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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an 26. 2021

미술관에서

낯선 눈치

취향을 공유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특히 나는 각자의 예술적 취향을 나눌 수 있는 미술관 방문을 참으로 좋아하는데 주변에서는 생긴 것 답지 않게 고상한 취미라고 한다. 거뭇거뭇하고 덩치 큰 나라고 해서 뭐 돼지국밥에 소주 두 병을 너끈히 마시며 걸쭉한 욕설을 내뱉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물론 그런 분위기도 너무나 좋아하지만 나는 고즈넉한 미술관도 못지않게 좋아한다.


내가 미술관을 좋아하는 이유는 특유의 거리감 때문이다. 작품에 집중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감상자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한 발짝 물러설 줄 아는 매너를 갖춘다. 그것은 미술관의 암묵적인 룰이다. 그래서 나는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흔히 말하는 '사진 맛집') 전시는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그곳에는 미술관이 갖춰야 할 거리감 따위는 살포시 무시하는 무뢰한들이 많다. 가장 예쁜 분위기의 구도를 잡을 수 있는 스폿마다 북새통을 이루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혀를 끌끌 차며 근처를 서성거리다 대놓고 피사체들에게 눈치를 준다.



코로나 시대부터는 벼르던 전시들이 줄줄이 취소되며 미술관 방문이 뜸해졌다. 간혹 예약제로 실시하는 전시를 보러 가게 되면 평상시보다 쾌적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묘한 기쁨을 느낀다. 코로나가 마냥 우리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닌 듯싶다. 물론 미술관에서 말이다.




미술관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데이트 코스로도 훌륭하다는 것이다. 큰 미술관의 경우 넉넉잡아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을 때울 수 있으며 체험형 전시와 같이 인터랙티브 한 작품이 있다면 인상 깊은 추억이 생기기도 한다. 내 연인을 도촬 하는 것이 쉽게 허용된다는 점(또, 은근히 그것을 바란다는 점)도 데이트에 좋은 요인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예쁘지만 자연스러운 사진이란 미술관에서 자주 탄생한다.


미술관은 혼자 가기에도 좋다. 사실 작품을 오롯이 느끼려면 미술관은 혼자 방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오디오 가이드라도 신청하게 된다면 감상 시간은 곱절로 늘어난다. 하지만 나는 그냥 이어폰을 꼽고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들으며 흥미로운 작품들 위주로 진득하게 감상을 이어가는 것을 더 선호한다. 40분이고 퍼질러 앉아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다른 작품을 감상할 시간이 부족할까 싶어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싶다가도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만다. 동행자가 있다면 이 과정은 대폭 축소된다. 아쉽지만 현시대는 5분 내외로 끊을 수 있는 작품의 선호도가 높다.



미술관의 공간 구성을 살펴보는 점도 흥미롭다. 나는 보통 굵직굵직한 여러 개의 기획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대형 미술관을 선호하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관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석파정 서울미술관, 일민미술관이다. 특히 일민미술관은 한 층의 평수가 그리 넓지는 않지만 건물의 수직적 구조를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전시를 자주 선보인다는 점에서 아티스트와 큐레이터의 오랜 고민이 엿보이는 흔적들이 많았다. 반면 대림미술관은 일민미술관과 비슷한 구조지만 관람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배치와 특유의 비싼 척하는 분위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곤 한다. 전시의 퀄리티에 비해 비싼 입장료도 한 몫한다.




하지만 이 모든 미술관의 장점을 뒤로하고 내가 매번 미술관에서 기대하는 것은 '낯선 눈치'다. 나는 바로 어제 발매한 콜드(Colde)의 <미술관에서>라는 음악에서 이 글의 영감을 받았는데 이 음악은 듣는 것만으로도 내가 미술관에서 느끼는 낯선 눈치를 머릿속으로 그려지게 했다. 신기한 것은 음악을 먼저 듣고 뮤직비디오를 시청하게 되었는데 내가 상상했던 그림과 거의 일치하는 구성과 장면이 많아 놀랐다.


낯선 눈치가 무엇이냐고? 앞서 나는 미술관 특유의 거리감이 좋다고 말했다. 거리감은 필연적으로 눈치를 만든다. 그리고 눈치는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특히 이성의 얼굴을 말이다.



나에게는 이 낯선 눈치가 묘한 애정과 공감으로 연결된 사례가 여럿 있다. 그러니까 나는 미술관에서 만난 이름 모를 그녀들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다. 왜인지 그녀들은 또래의 다른 여자들보다 스타일리시했고 전시를 혼자 관람했다. 심지어 사람이 적은 이른 아침이나 애매한 오후 시간대에만 발견되었다. 이들은 분명 어느 면에서는 나와 같은 결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우리 둘은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서로를 염탐했다. 아니다. 이것은 철저히 내 기준일 뿐이니 표현의 정정이 필요해 보인다. 나 혼자 그들을 의식했다.




하지만 이러한 낯선 눈치가 간접적인 접촉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다. 2년 전 부산 현대미술관에서 관람한 권병준 작가의 <자명리 공명 마을>이 그랬다. 커다란 지하 전시장 한 곳을 통째로 사용한 이 반응형 전시는 관람자들이 헤드폰을 쓰고 전시장을 돌아다니다 일정 거리 내의 다른 관객에게 모종의 액션을 취하면 서로를 링크시키는 구성을 갖췄다. 당시 전시장에는 몇 명의 아줌마와 나, 그녀가 있었다.


아줌마들은 "이거 왜 안 되는 거야!" 하며 전시장을 떠났고 나는 덩그러니 남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헤드폰을 쓴 채 마치 깊은 의미라도 있는 작품을 발견한 것 마냥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작품 설명 팻말을 읽고 있었다. 때마침 그녀가 큐레이터의 권유에 헤드폰을 쓰고 있었고 곧이어 초롱초롱한 눈으로 링크 상대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그녀는 내 눈을 피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녀가 내 뒤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작품의 링크를 위해선 다른 관람객에게 고개를 숙이는 액션이 필요했고 아마도 그녀는 나 몰래 나와 링크를 만들려 했던 듯싶다. 나는 그 순간 아주 발칙하게도 어떤 향을 맡았다. 그리고 무언가에 이끌린 듯 몸을 빙그르르 돌려 그녀에게 목를 건넸다. "이렇게 하는 건가 봐요?"


내가 쓴 헤드폰에서 "교환되었습니다"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무엇을 교환했을까. 교환을 계기로 엉겁결에 그녀와 전시를 함께 관람하게 됐다. 사적인 말은 전혀 나누지 않은 채 우리는 전시장 곳곳을 돌아다녔고 취향을 나눴다. 그리고 전시장을 나왔을 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길을 갔다. 잠시간 양심에 찔리는 발칙한 상상이 샘솟았지만 금방 관뒀다. 여기는 미술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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