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May 14. 2021

다정한 남자가 되는 법

착한 남자 박찬우

상남자의 시대를 넘어 드디어 다정한 남자의 시대가 왔다. 과거 '나쁜 남자'가 한쪽으로 쏠린 남성들의 착각에 불과한 유행이었다면 '착한 남자'는 사실 꽤 오래전부터 여성들에게 꾸준한 인기를 끌던 남성상이었음에도 이 시대정신만큼은 제법 늦게 우리의 연애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


물론 한 가지 전제조건이 붙는다. 잘생김? 가장 당연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다. 바로 '찌질함'이다. 지금 시대의 다정한 남자는 '찌질하지만 나만 바라보는 남자(잘생긴)'다. 과거 나쁜 남자의 매력이 여성에게 나쁘게 행동하거나 틱틱거리지만 은근히 챙겨주고(츤데레) 잘생긴 남자였다면 지금 연애 시장의 최상위 포식자는 '대놓고 헌신적이며 다정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친구가 없어 나만 바라보는 잘생긴 남자'다. 최후방의 잘생긴을 뺀다면 나와 100% 상응하는 모델이다. (하지만 잘생긴을 만족하지 못한다면 전자는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 ㅠㅠ)


또한 이는 상대적으로 평범하게 생겼거나 못생긴 남자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얼굴이 그렇게(?) 생겼으면 적어도 다정할 줄은 알아야 한다는 포근함의 논리가 당연해진 것이다. 아, 우리의 애정은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보인다. 차라리 나쁜 남자가 되는 것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 다들 알다시피 우리의 나쁨은 매력이 아니라 악취로 평가된다. 내 나쁨에 그녀들은 호감보다는 역함을 느낀다. 나를 '나쁜 남자 박찬우'보다는 '썅놈 박찬우'라고 부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나는 이 '다정함'이 나와 꽤 가까운 낱말이라고 믿어왔다. 연애 초기의 그녀들은 하나같이 내 다정함에 반했다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이 다정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졌다. 나는 갈수록 나빠졌고 기념일 정도에만 짜치는 다정함을 가끔씩 꺼내 보이곤 했다. 나는 아니라고 외쳤지만 그녀들은 하나같이 내가 '변했다'라고 말했다. 너, 찬우는, 오빠는 나쁜 남자야. 후. 허나 하나 맹세할 수 있는 것은 내 진짜 속마음은 그녀들을 항상 다정하게 사랑해왔다는 것이다. 다만 더 바쁜 내일이 있었을 뿐.


어느 정도 연애의 신호탄을 위해 나를 포장해왔다는 것도 부인하진 않겠다. 앞서 말했듯이 '잘생긴'을 뺀다면 현시대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찌질남'에 가까운 나는 때때로 호감을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다정해지기도 했다. 술에 취한 그녀에게 보란 듯이 소주잔을 뒤집어주기도 했고 짧은 치마의 그녀를 위해 겉옷을 벗어주기도 했으며 감기에 걸린 그녀에게 전복죽 기프티콘을 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인위적인 다정함을 나는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분명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조금씩 호감을 쌓는 과정이란 것을 알면서도 나는 "방금 내 매너 쩔지 않았냐?" 따위의 생색을 냈다. 내가 그런 오그라드는 행동을 했다는 것에 대한 가책을 느낀 일말의 변명이었다. 이래서 연애 상대로 경상도 남자는 적합하지 않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데 나는 그 애매한 중간이 너무나 싫었다. 그냥 넘어가면 될 것을 꼭 호들갑을 떨어야만 마음이 편해졌다. 유난 떨지 않으려 유난 떠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정작 그녀들은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 듯했는데. 내 다정함은 매번 낯간지러운 것이었다.




최근 직장동료인 N양과 자주 붙어 다니면서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다가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꽤 다정한 동료가 아니냐고 물었고 그녀는 단박에 아니라고 답했다. 아마도 지나치게 말이 많고 이기적이나 아주 사소한 부분에선 감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화제를 돌려 그녀의 남자 친구는 다정한 사람이냐 물었고 그녀는 그렇다고 말했다. 다음은 나와 그녀의 남자 친구가 가진 다정함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화의 일부다.


나: 너도 남자 친구한테 "내가 어디가 좋아"라고 물어?
N: 그럼요.
나: 그 친구는 그럼 어떻게 답변해? 그래 봐야 뭐 예쁘다, 귀엽다, 똑똑하다 같은 거 아니야?
N: 제 남자 친구는 좀 달라요. 말하기 부끄러운데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N아, 너는 키가 작지만 얼굴도 작아서 비율이 좋아 보여. 그래서 무슨 옷을 선물해도 다 잘 어울려" 이게 진짜 다정한 거죠.


나는 무릎을 탁 쳤다. N의 남자 친구는 단점을 서두에 둔(키가 작음) 반전의 두 문장으로 자그마치 4가지 다정함(작은 얼굴, 좋은 비율, 선물, 잘 어울림)을 전달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본 투 비 다정함이란 것인가? 나는 저런 답변이 가능한 남자가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남자는 실재했고 나름 '여심 솜사탕' 정도는 된다고 믿어왔던 나는 분하지만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남자를 어떻게 이겨? N의 예시는 마음속 깊이 새겨놓기 위해 포스트잇에 써 내 사무실 한편에 붙여뒀다. 나의 다정함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인정받고 말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다정한 남자라고 자부한다. 나는 본성이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니까. 약자의 난처한 상황에 불같이 화를 낼 줄 알고 강자의 압력을 유연하게 받아치거나 파쇄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인위적인 다정함을 스스로 낯간지러워하던 나는 사회가 말하는 '다정함'에도 이미 나만의 확고한 정의를 내려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나긋나긋한 말투와 따뜻한 눈빛은 가지지 못했어도, 또 그걸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며 구태여 표현하려 들지 않아도, 더 솔직하게는 학습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음에도 나는 분명 다정한 사람일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발뺌한다. 내 입은 속여도 눈은 못 속이지. 항상 내 눈은 누군가의 좋은 점을 찾기 위해 바쁘게 굴러가니까. 관찰은 곧 다정함이고 이 다정함이 결국 애정을 만드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미술관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