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관조인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Feb 03. 2022

MBTI에 과몰입하는 사람들

MBTI는 과학이 맞다. (엄근진)

내 MBTI는 ENFJ다. 1년에 한 번씩, 네 번 정도 검사를 받았고 그때마다 동일한 결과가 나왔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정의로운 사회운동가 유형의 사람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들 중 다수가 ENFJ인 것을 보면 어쩌면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MBTI 따위에 큰 의미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과 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만 같아 괜스레 기분이 좋다.


나는 MBTI, 애니어그램, DISC, MMPI-2 같은 심리검사를 좋아한다. 하나로 규정하기 힘든 내 정체성을 그나마 잘 표현해주는 또 다른 명함을 가진 것 같아서다. 박찬우. 28세. ENFJ.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 또한, 때로는 나 스스로도 잘 캐치하지 못하는 구석진 내면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정신건강에도 좋은 것 같다. 가끔 소름 돋을 정도로 합치율이 높은 심리검사를 만나면 깜짝 놀란다. 어떻게 나를 이렇게 잘 정의하지?


하지만 MBTI는 이제 지겹다. 아, 지겹다기 보단 MBTI란 틀에 나를 가두거나 스스로를 가두는 남들이 지겹다. 내 MBTI인 ENFJ를 예로 들어보자.



우선 나는 붙임성이 좋지 않다. 남들은 내가 붙임성이 좋다고 평가하지만 사실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고 싶다거나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는 사람이다. 칭찬에도 상당히 인색한 편이다. 비유를 잘 활용하는 것은 사실이나 어떤 부분에서는 책임감이 그리 강하지 않다. 변화에 보수적인 편이며 감수성은 아주 풍부하다. 도표를 싫어한다기보단 알아보지 못하는 수치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며 딱히 대범하진 않다. 타인의 가능성보다는 장점을 잘 찾아내고 추진력은 준비 단계에서만 꽤 있다.


타인의 눈치는 엄청나게 보며 상상력은 매우 풍부하다. 보통 염세적인 표정을 짓고 다니며 넓은 오지랖은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적용된다. 카리스마가 있다는 평가는 자주 받았고 눈앞의 이익보다는 먼 미래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한다. 종종 성급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테고 오그라드는 표현은 매우 좋아하고 또, 잘한다. 카테고리에 따라 열정적인 경우가 있다. 책을 선물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며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요시한다. 동정심이 아주 많고 세계평화에는 관심이 없다.



대충 봐도 반절은 틀린 내용들이다. 몇몇 특징은 딱히 ENFJ라서 해당되는 사항은 아닌 듯하다. 특히 주목할만한 차이는 내가 E라는 것에 깜짝 놀라는 친구들이 많을 정도로 나는 외향보다는 내향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친구들과의 사교모임도 물론 좋아하지만 굳이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바깥보다는 집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세밀하게 따져 봤을 때 나는 그나마 ENFJ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호기심이 많고 정은 그보다 훨씬 많아서 쉽게 마음을 주다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잦으며 사소한 일에도 의미 부여한다. 갈등에서는 언제나 이기려 들고 대부분 이기는 편이지만 분쟁을 싫어하고 물욕이 없다. 무리에 속하는 것과 고독을 즐기는 상황 둘 다 나에게는 소중하며 아주 정의로운 사람이다. 남들이 나서지 않는 일에 발 벗고 나서는 희생자 성향이며 걱정이 많아도 티를 잘 내지 않아서 가끔은 차갑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소중한 추억들을 절대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으며 고집이 무척 세다.




자, 여기까지가 내가 작년 9월 즈음 MBTI와 관련된 피로감을 잔뜩 쏟아낸 뒤 방치해둔 글이다. 2022년 임인년, 29살의 나는 어떻게 되었냐고? 그 누구보다 열렬히 MBTI에 과몰입하는 사람이 되었다!


환경은 사람을 바꾼다. 특히나 현시대 사회에서 회사는 사람을 크게 바꾼다. 당장 내 주변 사람들만 봐도 입사 이후 MBTI가 변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꽤 있다. (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는데 그게 뭔가 자랑스럽기도 하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어느 곳보다 개성을 쉽게 말살할 수 있는 곳이며 스스로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자위할 수밖에 없는 조직이니까. 내가 최근 직장 선배에게 들었던 가장 충격적인 충고는 동료들에게 귀엽다는 말을 자제하라는 것(물론 그의 선한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이었다. 귀여운 것을 보고 귀엽다고 말하는 것이 사회생활에서 큰 결함이 될 수 있다니!


내가 MBTI에 과몰입하게 된 큰 이유는 또 이놈의 '유난 떨지 않기 위해 되려 더 유난 떠는' 인자 때문이다. 천생이 힙스터를 추구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오히려 근래 들어 MBTI를 혐오하는 것이 인싸의 표상이 된 문화 현상에 반발하는 심리 때문에 나만 또 거꾸로 걷게 되었다. 엠비티아이 재밌잖아 왜.



물론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연하게도 사람 때문이다. 모두가 지겹다고 말하는 MBTI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자리에서도 빠지지 않는 화두가 되고 있다. 혈액형론보다 훨씬 많은 유형을 분류하고 있고 문항지가 많아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는 심리유형 검사이며 가볍게 질문하나 은근히 무겁게 소모되는 아이스브레이킹 주제인 것이다. 너 무슨 형이야? 나 A형! 오, 그럼 너도 소심해? 따위의 일직선 대화에서 인류는 기특하게도 16가지의 유형으로 서로를 재단할 줄 알게 된 것이다.




내 경우에 시작은 INFP와 ISFP들의 습격 때문이었다. 내 MBTI인 ENFJ와 환상의 궁합이라는 이 둘은 내가 존재를 알아차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성향이 잘 맞는 '착하고 조용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어쩜 이렇게 귀염 뽀짝 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일까 궁금해 이것저것 취향을 물어보면 그들은 개성이 약간 흐릿하며 어딘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내향적인 인간이었다. 그러나 MBTI가 한반도를 점령하고 나서는? 그들을 하나로 정의할 수 있는 알파벳 네 개가 하필이면 INFP와 ISFP 딱 둘 뿐이었다!


특히 인프피(INFP)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내가 정말 아끼는 친구들과 다가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죄다 인프피다! 어딘가 대형견의 바이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고양이 같은 매력을 가진 당신들 때문에 나는 매일 밤을 설친다. 우리 둘을 뺀 다른 유형들은 이들을 '씹프피'라고 부르며 평가절하하는 편향적인 의견이 있으나 나는 인프피들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사랑스럽다. 씹? 인프피를 이렇게 부르는 너네가 씹이라고 나는 확언할 수 있다 이 씹새끼들아. 잠시 급발진한 점은 사과한다.



잇프피(ISFP)는 또 어떤가! 난 이들의 일상적인 나태함과 쏟아지는 칭찬 폭격에 몸 둘 바 몰라하는 모먼트들을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사랑한다. 대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나무늘보 같은 사람들. 하지만 내 애정 표현을 아주 재빠르게 캐치하고 어떤 식으로든 리워드로 돌려주는 이들의 배려심에 오히려 내가 몸 둘 바를 모를 때가 많다. 난 이 유형의 사람들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가까이하고 싶어 늘 몸을 베베 꼬며 주변을 맴돈다. 난 이들 근처에서 맛있는 걸 챙겨주고 싶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사로잡힌다.



세상에 인프피와 잇프피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은 티를 내든 아니든 내 사소한 감정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난 온몸으로 체감한다. 내가 당신들을 너무나 아끼는 나머지 가끔은 실수를 하고 그것을 죽도록 미안해한다는 걸 알아줘서 감사하다. 어느 부분에서는 나와 너무 맞지 않는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당신들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는 정말 천생연분이라는 걸! 그게 나 혼자만의 내적 친밀감 때문이라고 말해도 좋아. 사랑해 인프피, 잇프피!!!




그렇다면 내가 싫어하는 유형은 어떤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변은 사실 아직도 규정하지 못했다. 싫어하는 사람이 정말 많은 나는 웃기게도 누군가를 싫어하게 되면 대화 자체를 차단하기 때문에 그들의 MBTI를 알 턱이 없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MBTI를 선뜻 싫어하게 되면 내가 만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경우의 수 중 다수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과몰입 안 하면 안 되냐고?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들이 싫어.


어딘가 불편하면서도 끌리는 존재들은 물론 있다. 이들은 대부분 T를 포함한 MBTI를 가진 사람들이다. 언제나 결과보다 과정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감정적인 나는 T들에게 인지부조화를 느낄 때가 많다. 그들은 이유모를 차가움을 늘 가지고 있어 가끔은 내가 큰 말실수를 했나 싶은 순간들이 있어 조마조마하다. 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공감을 바라는 내 이야기들을 나노 단위로 난도질하고 또 챙겨준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하는 걸 가진 사람들을 아주 동경하는 사람답게 T에게 본능적으로 끌린다. 그들은 오히려 나를 조금 귀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내가 그들을 일방적으로 좋아한다.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친구 중 하나는 ISTJ인데 (절대 닮고 싶지 않아 정반대로 가려 노력했던 우리 아버지의 MBTI와 동일하다.) 그는 나와 정말 다른 사람임에도 배울 점이 많고 호감 가는 사람이다. 이 정도면 MBTI와 무관하게 내가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또 그게 ENFJ의 특징이라고 한다. 으윽.


MBTI 궁합에 따르면 나와 최악의 궁합은 ESFP, ISTP, ESTP, ISFJ, ESFJ, ISTJ, ESTJ라고 한다. 아니 유형이 16개인데 최악이 7개라고? 역시 인간은 어렵고 복잡한 동물이다. 내 아버지가 ISTJ, 어머니가 ISFJ, 동생이 ESFJ, 누나가 ESFP인데. 정말 나는 미운 오리 새끼가 틀림없다. 어쩌면 그들과 너무나 달라지고 싶었던 나머지 내가 ENFJ가 된 건 아닐까요? 설 명절, 하하호호 웃었다. MBTI가 이런 또 이런 장점이 있다니까.




MBTI를 맹신하게 되고나서부터는 일상 곳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들의 MBTI를 확인하고 집에서 몰래 검색해봤다. 수많은 아티클과 스낵 컬처 콘텐츠를 읽어보며 무릎을 탁 치고는 그럼 그럼 내가 이래서 이 사람을 좋아하지, 검증받아야만 마음이 편해졌다. 어떤 식으로든 나와 맞지 않다는 글은 이를 악물고 무시하며 그들이 가진 유형의 장점만을 눈에 담았다. 나 어쩌면 사람을 정말 좋아하나 봐.


얼마 전 어떤 분이 내게 당연하단 듯이 "PD님은 ESTP죠?" 하고 물었다. 내가 ENFJ라고 반문하자 깜짝 놀라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ESTP의 성향을 찾아보니 관련 매운맛 글에 양.아.치. 세 글자가 써져있었다. 양아치라니. 나 그런 소리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좀 더 읽어보니 한 가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포착된다. 카톡보다 전화를 선호한다. 나 이거 거짓말 절대 아니고 사실 콜 포비아 있거든요?



ESFP의 그녀가 내게 "오빠, 우리는 정말 안 맞아"라고 말했던 순간도 떠오른다. 정확히 우리 누나와 같은  MBTI를 가지고 있어 가끔 누나가 오버랩되기도 했지만 나는 그녀의 좋은 점을 지금 이 순간에도 적어도 열네 개 정도는 댈 수 있는데. 우리 누나만큼 내가 그녀를 아꼈다는 것을 아무리 표현해도 닿지 않는다는 게 자주 안타까웠다. 너 진짜로 나 같은 남자는 앞으로 절대 못 만날 텐데. 아님 말고.




INFJ 선배가 내 MBTI를 물었을 때. 내가 그의 아내 분 MBTI를 물었을 때. ESFP와 INFJ의 궁합을 찾아봐주며 최악의 궁합인데요?라고 멋쩍게 답변했을 때. 나는 뜻밖의 큰 배움을 하나 얻었다.


연애할 때도, 결혼한 지금도 가끔 와이프랑 안 맞는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근데 그건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난 오히려 우리가 달라서 더 잘 지낸다고 생각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소개팅하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