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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Feb 15. 2021

소개팅하는 사람들

소개팅 어렵지 않아요

최근 내 친구들 사이의 주된 화두는 주식과 소개팅이다. 돈과 사랑. 이 어쩔 수 없는 삶의 부분집합들은 지겹도록 우리를 쫓아다닌다. 다만 그 범위가 좀 더 광대해졌으며 이전보다 더 짙은 농도의 중독성을 가졌을 뿐.


근래 들어 소개팅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왕왕 든다. 내가 외로운 것인지도 잘 파악이 안 되는 요즘, 막연하게 들어오는 소개팅 제안을 어물쩡 거절하고만 있는 내 모습이 어딘가 우습다. 인연은 오롯이 내 힘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어왔는데. 요새는 도통 사람을 못 믿겠다. 아직도 사랑이란 내게는 너무나 고귀한 것인가 보다. 쉴 틈 없이 사랑을 지속해왔다고 자부하지만 사랑이 만드는 성숙에는 여전히 물음표만 가득하다. 조금씩 배워나가며 언젠가 만나게 될 새로운 인연을 위한 나만의 토양을 일구고 있다 여겼지만 실은 그러한 성장이 체내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가 이제는 의심스럽다. 정말로 사랑에 숙련은 없는 것일까.



자만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다. 모든 사람들이 희망하는 최선의 연애법이나 성사되기 어렵다. 많은 재화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점에서 효율과 가성비로 흘러가는 요즘 시대에는 매우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특히나 시간에 더욱 민감해지는 시기에 있는 사람일수록, 사랑이 1순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이 자만추와 멀어진다. 그렇게 사람들은 하나둘 소개팅이라는 시장에 본인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구조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이전부터 느껴왔다. 잠시 내 대학 시절로 돌아가 보자. 13학번의 파릇파릇한 신입생, 1학년의 나는 과팅에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나 볼 수 있는 수지 같은 여자 친구와의 만남을 상상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졸업 전까지도 그 흔하디 흔한 과팅을 끝내 해보지 못한 비운의 예술대 남학생이었지만 주변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지는커녕 합성수지도 찾기 힘들었다고 하니 딱히 큰 아쉬움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팅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였다.



과팅은 애초에 연인을 만들러 나가는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하루를 재밌게 놀 수 있는 인연을 만드는 자리라고 했다. 오, 이런. 뭐 하러 내 돈과 시간을 낭비해 가며 그런 무의미한 만남을 지속하는 거지? 차라리 그 돈으로 나를 더 꾸며 되파는 게 남는 장사 아닌가? 그들은 내 말에 혀를 끌끌 차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너는 어차피 뒤질 거 뭐하러 아직까지 사냐?"


나는 되돌아보면 죄다 무의미했던 사랑을 찾아 헤매면서 고작 이 과팅 따위에 의미를 찾는 멍청이였다.


하지만 내 스무 살의 궤변은 현재 시점에서 되짚어보면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 않나 싶다. 두 글자에서 세 글자로 진화했을 뿐이지만 과팅과 달리 소개팅은 좀 더 섹슈얼한 상징을 내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개팅에는 명확한 목적성이 있다는 것이다. 남녀, 남남, 여여 간의 성적 합의. 이 것이 소개팅의 가장 큰 존재 의의였다.


그런 말이 있다. 소개팅을 30분만 해봐도 내가 이 사람과 잘 될 수 있을지가 가늠이 된다. 더 속된 말로는 내가 이 사람과 키스하는 장면을 수월하게 상상할 수 있다면 반은 성공했다는 성의 논리가 소개팅에는 존재한다. 소개팅을 희망하는 사람에게 인연이란 허울 좋은 단어는 쓸데없는 낱말이었다. 애프터를 받아내느냐. 또, 그 애프터가 연인 관계로 이어지느냐가 소개팅의 유일한 결승점이었다. 이 관계에 '친구'란 얄팍한 단어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친구는 너 아니어도 돼. 내가 필요한 건 애인이니까.




특히 소개팅은 사랑도 해볼만큼 해봤고 금전적으로도 아쉽지 않은 어중간한 성인들에게서 횡행했다. 이들은 누군가를 만날 시간이 없다는 변명으로 본인의 가치에 바코드를 다는 소개팅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본인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진정한 사랑을 만나고자 소개팅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감히 위선자 딱지를 붙이려고 한다. 그게 아니라면 상대방의 외모와 직업, 재력을 묻지 않고 좋아하는 가수나 작가, 작품을 물어봤을 테니까. 아쉽게도 후자는 소개팅이 성사된 이후에나 물어볼 법한 카테고리의 질문이다.


결국 이 또한 내 것을 잃고 싶지 않아 출발지점을 맞추는 감정의 방어기제였다. 사랑만큼 확실한 계급 차이가 존재하는 분야가 또 없으니까. 이왕이면 다홍치마. 굳이 만날 수 있다면 나보다 조금 더 나은 환경의 짝을 희망하는 것은 수학의 공식, 종교의 율법, 우주의 섭리다. 태초부터 전해져 내려온 DNA인 것이다. 다만 그것을 사회적 가면을 쓴 채 포장할 필요 없이 주선자의 진두지휘 아래, 처음부터 '급'을 맞춰놓고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개팅은 편리성 또한 갖췄다. 그렇게 소개팅은 문자 그대로 자극적인 인스턴트가 되었다. 사랑도 이제는 물을 붓고, 적당한 익음을 기다렸다, 후루룩 마셔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많이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프기 전까진 아무도 모른다. 소량이라면 몸에 큰 해가 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 소개팅에도 '이만하면 됐다'는 자기만족이나 순응은 그리 큰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급을 맞춰도, 더 높은 급을 갖춰도 소개팅 속에는 여전한 사랑의 힘이 작용한다. 나의 호불호가 그대와 합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처지는 비슷하더라도 계약은 체결되지 않는다. 소개팅에는 사랑이 가진 냉철한 균형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나잇이나 파트너십과 같이 더 비밀리에 진행되는 유형의 사랑과 쉽게 혼동되기도 한다. 이를 깊게 경험한 '소개팅 중독자'일수록 대개 두 갈래로 변화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지거나 자만추로 회귀하거나.




그러니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다시 한번 탄복하게 된다. 그들은 이 모든 사랑의 프로세스를 경험한 끝에야 '선'이라고 부르는 합리적인 사랑의 최종 알고리즘을 도출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더 강력한 특례 합의가 있다. 선에는 포기를 인정할 줄 아는 자세가 있다.


모든 선이 그렇진 않겠지만 선에는 '썸'을 건너뛸 수 있는 배포가 있다. 소개팅과 달리 선에는 연륜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집안 어르신들이나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이어지는 선의 관계는 철저한 자본주의의 흐름을 따른다. 내 집안과 비슷한, 내 처지와 비슷한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결혼 적령기의 이들에게는 비록 사랑의 설렘은 부족할 순 있어도 높은 합리성이 우위를 차지한다. 요즘 같은 자유연애 시대에 누가 선을 보냐고? 나는 오히려 그 질문에 역으로 묻고 싶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이혼율은 왜 갈수록 높아지는가! 애틋함은 밥 먹여주지 않으며 다들 알다시피 감정이란 쉽게 타오르고 식는 화학작용에 불과하다.


결국 사랑 또한 나를 가판대에 올려놓고 호객행위를 벌이는 일이라는 것에 분하지만 항복 선언을 해야 한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만큼 무기력한 말도 없지만 다들 그렇게 산다. 이왕 팔릴 거라면 가장 비싼 값에 나를 내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비굴한 내적 합의. 그것이 썸을, 과팅을, 소개팅을, 선을, 사랑을 성공의 반열에 가장 가깝게 올려놓을 수 있는 유사 정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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