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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Nov 22. 2020

유교걸이 된 사람들

아이 러브 유, 퀸 와사비

여러분은 '유교걸'이라는 신조어를 아는가? 얼핏 2008년에 발매한 이효리의 히트곡 <U-Go-Girl>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겠다. 우선 이 단어는 해당 곡의 제목으로 말장난을 친 게 맞다. 하지만 뜻은 '지나치게 보수적인 유교문화에 길들여진' 여성들을 뜻한다. 이효리의 해당 곡이 진취적인 여성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 반대 모티브는 어딘가 생각해볼 만한 여지를 주는 듯하다. 나는 언어유희로서 이 단어가 가진 상징성도 대단하다 생각하지만 그 속에 담긴 현시대 젊은 여성들의 시대상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교걸'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자조적이다. 성인 이전,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수없는 제약이 걸린 젊은 여성들을 상상해보자. 과거 그녀들에게 주민등록증이란 그저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됐음을 증명하는 수단밖에 되지 못했다. 아버지들 혹은 어머니들의 눈초리는 여전히 날카로웠고 여러 소셜 미디어를 등지로 '엄마/아빠 몰래 야박하고 오는 팁' 등이 그녀들 사이에서 대놓고 공유되었다. 실제로 나의 친누나도 이러한 부모님의 만행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MBC, <라디오스타 - 24살 직장인 딸에게 밤 10시 통금 시간 주는 김가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점이 당연시됐다는 것이다. "어디 여자가.."라는 말을 시작으로 유교 꼰대들은 합법 성인이 되어 담배를 사는, 타투를 새기는, 밤늦게 음주가무를 즐기는 그녀들을 '잘못되었다'라고 힐난했다. 물론 그 반대편에 있던 남성들에게는 이러한 질타가 절대적으로 덜했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확실히 그녀들은 단순히 성별을 이유로 지나친 사회문화적 제약을 겪어왔다. 그 뒤에 붙을 여성의 근력 부족, 범죄 피해율, 그로 인한 부모의 걱정 등을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기형적인 대한민국의 유교 시스템에 어느 날 갑자기(이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페미니즘이 정착했다. 그 형태는 크게 리버럴, 래디컬 페미니즘으로 나뉘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유독 한쪽 진영의 이념이 도드라지게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래디컬 페미니즘'이다.


트위터, <래디컬 페미니즘 vs 리버럴 페미니즘>


한때, 범국민적 질타를 뒤집어쓴 '일베'와 성별이 바뀐 대척점에 있다는 '메갈', '워마드'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곳에 속한 그녀들은 이제 부모 욕보다 심하다는 '일베충'과 비슷한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지만 분명 주목해야 할 만한 변화를 만들기도 했다. 미러링, 미투 운동, 여성 서사, 우먼 파워 등이 어쨌든 한국 사회에서 불편함의 눈총을 받더라도 정착할 수 있는 연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행태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들이 리버럴 페미니스트보다 눈에 띈 이유는 그 이념이 가진 과도한 폭력성과 자극적인 반대 어휘들 때문이었다.


메갈리아


어쨌든 이제 대한민국의 젊은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란 패시브 스킬처럼 정착했다. 그녀들 모두가 괴팍한 여성운동의 지지자라는 뜻이 아니라 이 유교 문화에 잠식된 과거의 보수적 여성으로서의 탈피가 당연하다는 것을 체화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그녀들은 조금씩 본인의 이야기를 펼쳐나가기 시작했고 남녀 갈등과 같은 여러 부작용을 만들어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으로써 본인의 정체성을 완고하게 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교걸'이라는 단어의 등장은 흥미로운 점을 시사한다. 앞서 나는 이 단어가 상당히 자조적이라고 정의했지만 재밌게도 유교걸은 단순히 자조의 의미로만 사용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녀들은 "유교걸들 뒤집어진다!", '매운맛 콘텐츠, 유교걸들 열광!' 등의 표현을 통해 그들이 속해있는 유교걸의 모습을 완강히 거부하고 벗어나려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교 문화를 파괴하는 여성, 소위 말하는 '센 언니'들은 그렇게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언프리티 랩스타>에 출연해 수많은 밈을 만들어낸 가수 겸 래퍼 제시가 그랬다. 그녀는 이국적인 외모와 어설픈 한국말로 자연스럽게 한국의 유교 문화에 통쾌한 일침을 날렸고 수많은 여성들의 워너비가 되었다. 이후 최근에 등장한 센 언니로는 '퀸 와사비'가 있다. 그녀 또한 언더그라운드 힙합씬에서 '한국의 카디 비'로 알음알음 이름을 알리다 <굿걸>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대중들에게 크게 이름을 알렸다. 특히 퀸 와사비가 한국 여성들에게 현재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와며(퀸 와사비의 매력에 스며들다)'드는 이유는 그녀가 가진 캐릭터성 때문이다.


퀸 와사비 인스타그램


퀸 와사비, 본명 김소희는 94년생으로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육공학과 학사 출신의 엘리트 한국 여성이다. 실제로 교생 실습 때는 도덕 과목을 가르쳤다고 하니 타고난 '유교걸'의 인자를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파격적인 가사를 가진 '여성 서사' 음악으로 크게 히트했고 본인의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몸매를 적극 활용한 트월킹을 TV 매체에 선보이며 팝 스타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인 '갭'을 만들어냈다. 그러니 하나의 워너비로서 완벽한 캐릭터성을 지닌 것이다. 섹시하고 화끈한 라이프스타일을 살지만 알고 보니 똑똑하고 지적인 여성. 미디어가 꾸준히 표현하는 '멋진 여성'의 표본인 것이다.


위키트리, <"지금과 다르네" '트월킹 천재' 퀸 와사비가 공개한 이대 졸업식 때 사진>


그녀의 이러한 개성은 대한민국 유교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본래 한국 힙합의 지긋지긋한 클리셰인 '네 여자를 뺏어'는 남성 래퍼들의 전유물이었고 알게 모르게 여성 청취자들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다. 하지만 퀸 와사비는 이에 정면으로 반대의 입장을 취하며 '너네가 빠는 오빠들 난 매일 밤 노예로 삼아 - <Look At My!>' 등의 가사로 고착화된 성 역할을 바꾸는 쾌감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수많은 유교걸들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퀸 와사비의 행보를 지지하고 응원하게 되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 봐야 할까?




하지만 유교걸들은 이러한 파격적인 여성들의 행보에 열광하는 동시에 반대급부를 만들었다.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페미니즘의 흐름에 반감을 가진 남성들의 시작이었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걸 크러쉬 인사인 제시, 퀸 와사비, 화사는 그들 사이에서 '여초 픽'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이유 없는 비호감, 무관심 이미지를 획득했다. 동시에 조금 더 여성스럽지만 (이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여성 연예인들을 '올려치기'하는 현상을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최근의 '블랙핑크 뮤직비디오 논란'을 사례로 들 수 있겠다. 블랙핑크는 올해 10월, <Lovesick Girls>이라는 노래로 컴백했는데 해당 곡의 뮤직비디오 속 장면 중 섹시한 간호사 복을 입은 제니의 출연 장면이 몇몇 여성단체들에게 큰 질타를 받으며 수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후 제니가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한 사진 속에 착용한 바지가 'censored(검열된)'이라고 적혀있는 점을 미루어 검열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는 문제제기를 통해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할 말은 해야지, 속 시원하다, 이게 무슨 논란거리냐' 등의 반응을 끌어낸 반면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제니 기싸움하네, 여성 인권 떨어트리네' 등의 부정적인 반응을 자아냈다. 물론 서로 반대된 의견을 표출하기도 했다. 비슷하게 과거 아이유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악플러들의 대부분이 '괴팍한 페미'였다는 남성 위주의 낭설이 돌면서 유사한 반응을 끌어낸 사례가 있다.


머니투데이, <블랙핑크 제니, MV 의상 논란…"간호사 성적 대상화">
조선일보, <블랙핑크 제니 검열에 분노했나, 청바지에 써있는 단어가...>


이러한 아이러니는 야속하게도 아티스트의 수명을 갉아먹었다. 그들은 여성인 동시에 직업인으로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당연하게도 편향적인 이미지는 그들에게 독이 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관련 발언을 일체 한 적이 없다는 화사는 몇몇 남초 커뮤니티 사이에서 '이미지 때문에 명예 페미'가 된 불쌍한 걸그룹 멤버라는 동정 여론이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을 미루어보면 '남초 픽', '여초 픽'이 단순히 성별의 문제 때문에 생기는 차이점인지 과연 의문이 들기도 한다. 대체 현시대의 유교걸들과 남성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미싱 링크가 생겨난 걸까. 정말 단순한 우먼 파워와 맨 박스의 직/간접적인 세력 다툼일 뿐인 걸까. 카디 비(Cardi B)는 멋있지만 제니가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만의 특수성? 핀트가 엇나간 지적? 그렇다면 애초에 '유교걸'은 왜 자조와 희화화로 한국 여성들에게 조명되는 단어가 되었을까.


에펨코리아, <걸크러쉬 vs 성상품화.jpg>




이러한 답이 없는 무의미한 싸움은 여성 인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지금의 래디컬 페미니즘이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반발심처럼 오히려 더한 혐오를 낳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유교걸'이 한 단계 더 진화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대리만족, 멋진 여성으로서의 투영, 워너비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본인의 일관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내가 남성이라 꽤나 편향적인 시각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도 부인하지는 않겠다. 늘 그렇듯이 개개인은 남의 상황까지 고려할 정도로 너른 마음을 가지고 있진 않으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배우고 토론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단어의 힘은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자기 암시를 통해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무언가의 집단이나 단체를 정의하는 단어는 다른 낱말들에 비해 강력한 힘을 내포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러한 유교걸들의 반란을 환영하면서도 그들이 스스로를 구속하는 말들에서 더욱 자유로워지길 희망한다. 나는 화사도, 제시도, 제니도, 퀸 와사비도 아티스트로서 너무나 사랑한다. 이성적인 면에서도 너무나 매력이 넘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미래를 더욱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기에 되도록이면 과몰입을 자제하려고 한다.


인스티즈, <퀸 와사비 영상 댓글 변화>


수많은 유교걸들이 은근한 진영논리로 그들을 '나만의 연예인'으로 만드는 행동에는 그래서 반발심을 느낀다. 한때 퀸 와사비의 영상을 돌려보다 어떤 댓글에 그녀가 답글을 남긴 것을 기억한다. 댓글에는 벗은 여자들만 나오는 한국 남자 래퍼들의 뮤비 틈바구니에서 벗은 남자들이 나오는 여자 래퍼의 뮤비를 보니 너무나 속이 시원하다. 다음에는 이런(?) 마른 근육의 남성뿐만 아니라 근육 빵빵한 서양 남성들도 많이 출연시켜 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여기에 퀸 와사비는 아주 현명한 답변을 내놓았다.


"저는 이렇게 마르고 어린 동양 남자가 좋아요. 제 음악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예요."


나는 이러한 뚜렷한 주관이 진정한 유교걸의 탈피를 만든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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