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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Nov 10. 2020

2차 가해자가 된 사람들

가해자와 피해자는 종이 한 장 차이?

나는 근 3년 이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단어가 '2차 가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낱말이 되었다. 이는 앞서 작성했던 <중립기어를 외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선민의식을 느끼고픈 이들에겐 제격이기도 했다. 어느 기사에 붙든, 그 전후 과정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피해자를 두둔하고 '배려'한답시고 "2차 가해니까 언급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현상을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으니까. 물론 그게 나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여러분의 그 저의가 과연 순수했냐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그건 그저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리가 아닌가요?"라고 말하면 딱히 할 말이 없다. 내가 폭탄주를 진탕 퍼마신 뒤의 구토와 같이 여러분의 속을 훤히 내다볼 순 없으니까. 그러니 나는 여러분의 양심에만 그 판단을 맡긴다. 여러분은 정말로 피해자가 딱하고 가엽다고, 이와 같은 피해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여겨 2차 가해를 저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때때로 내가 속한 집단, 성향, 가치관에 따라 단순히 '우리'의 편의를 위해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것인가?


YTN




현시대 네티즌이 말하는 2차 가해는 엄밀히 말하자면 3차 가해다. 2차 가해는 말 그대로 문제 발생 후 해결하는 과정에 있어 또 다른 피해가 생김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서 A가 성폭행을 당한 것이 1차 가해라면 그 전위를 조사하는 수사 재판을 통해 생기는 피해자의 수치심 등을 2차 피해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 이후 언론 등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사례를 이리저리 씹어대는 행위는 3차 가해다. 순서에 따라 2차와 3차의 주동자가 바뀔 수는 있겠다. 어쨌거나 참 아득한 일이다. 피해의 순간도 고통스러운데 그 속을 전부 도려내 공공연히 전시하는 익명의 수백만을 아무런 저항 없이 지켜봐야 할 사람의 감정은 얼마나 황폐할까. 일견 2차 가해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려는 사람들의 선의가 (가장이든 아니든) 대견하다.


서울경제


하지만 나는 오히려 피해자를 위해 2차 가해라는 말이 지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결과적으로 2차 가해를 방지하기 위한 입막음은 피해자에게 어떠한 이득도 줄 수 없다. 이는 본질적인 문제다. 앞서 나는 수사 재판의 과정을 통해 피해자가 범죄의 순간을 상기할 수 있는 부분이 2차 가해가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2차 가해는 오롯이 수사 기관의 문제인가? 마냥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현재 많은 남자 의료 전공의들이 산부인과 전공을 기피하는 것처럼 수사 또한 때때로 원치 않지만 해야 하는 질문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것을 피해자의 '감정'으로만 초점을 맞추기에 거쳐가아 할 개선의 단계는 너무나 험난하다. 결과적으로 피해자에게는 '공론화'라는 또 하나의 N차 가해를 강제하기만 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결로 '미투(Me Too) 운동'에 대해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근래 수많은 2차 가해를 양산한 미투 운동은 애석하게도 피해자의 실체가 흐릿하다. 주변에서 수없이 행해지는 감정 공격을 견디기 힘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익명에 기대 본인이 당했던 피해를 폭로하는 이 운동은 시발점과 달리 많이 변질됐다는 의견을 낳았다. 가장 큰 이유는 피해자의 신상이 명확하지 않음이고 가끔은 그 의도가 불순해 보이며 아주 큰 확률로 상대방의 무고를 주장할 수 없는 '원천봉쇄의 오류'를 가졌기 때문이다. 한 가지 비슷한 상황이 연상되지 않는가? 바로 2차 가해랍시고 또 다른 사이버 불링을 서슴없이 행하는 지금의 네티즌과 다를 바 없다. 슬프게도 미투 운동은 '범인 색출'을 메인 테마로 피해자보다 가해자에 집중하는 아이러니를 만들었다.


MBC


둘째, 2차 가해란 어찌 됐든 '말할 권리'를 막는다. 얼핏 보기에 영화나 드라마의 결말을 말하는 '스포일러'를 방지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영화와 드라마와 달리 범죄와 부정적인 사건들에 2차 가해는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잔인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 바뀔 수 있다. 설령 그것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 피해자에게 어떤 기억을 연상하게 하더라도 말이다. '말하지 않음'이 칼로 암을 떼어내는 과정이라면 '말할 수 있음'은 항암치료다. 재발률을 확연하게 낮추기 위해서는 머리가 빠져도, 살이 빠져도, 때때로 많은 세포가 죽더라도 감행해야 할 일이다.


하나 더, '말할 수 있음'은 본질적인 '피해자 중심주의'를 만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워딩도 분명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설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쓴다. 우리는 어떻게든 피해자에게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 2차, 3차, 4차 가해자들을 지목해 맹목적인 비난을 쏟아낼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괴롭고 슬플 피해자들을 조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생각해야 한다.


KTV 국민방송




사실 나도 안다. 이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이 세상에 '피해자 다운 피해자'는 없으니까. 어떤 성인군자든 털면 먼지가 나오기 마련이고 왕따와 학교 폭력 피해자를 두둔하면서도 우리는 때때로 '왕따 당할만했겠지'라는 말을 가감 없이 내뱉으니까.


그래서 슬프다. 진영논리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과거 양예원 사건이 수많은 대립각을 세우며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흐렸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나는 그 상황을 가만히 관조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내 속마음에 역겨움을 느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기사를 보면 그녀를 욕했고 어떤 반박 기사를 보면 그녀의 상대방을 욕했다. 우리는 그저 그런 사람일 뿐인 것이었다.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라는 말은 그래서 힘이 없어 보였다. 2차 가해를 주의해야 한다며, 어떻게든 피해자 중심의 해결 과정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N번방 피해자가 아닌 박사, 갓갓과 같은 사회의 폐기물들을 물어뜯기 바쁘다. 그 과정의 감정 소모가 너무 큰 것은 물론이고 우리 스스로가 죄의 층위만 다를 뿐, 똑같이 나쁜 배설물을 뱉어낸다는 게 개탄스러웠다. 어느 한편으로는 트위터를 등지로 조건 만남을 먼저 제시하고, 입던 스타킹이나 뱉은 침을 판매했던 몇몇 피해자들의 상황 때문에 "걔네도 행실이 올바르진 못했다"라는 양비론을 펼치는 사람들에게도 내가 일정 부분 동의했다는 점이 한심했다.


한국경제


지금까지 나는 모순된 주장을 연계하며 논리적인 양 글을 썼다. 사실 이와 같은 (주로 증오 범죄 기반의) 현상에서 묵직하고 일관된 논리란 궤변에 가깝겠지만 적어도 나는 솔직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도 하나 제안하고 싶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결국 종이 한 장 차이다. 답이 없는 도돌이표지만 결국 가장 이상적인 정답이란 손가락을 멈추고 뇌를 움직이는 것뿐이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궁리를 지속하자. 누군가의 말에 휘둘리는 2차 가해자가 아닌 더 넓은 범위의 선함을 만드는 수호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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