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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n 30. 2021

엔젤링

악마의 반지

"난 반지가 싫어"


그녀가 더는 미룰 수 없다는 듯 힘겹게 꺼낸 커플링 이야기에 불쑥 내뱉어 버렸다.


반. 지. 가. 싫. 어.


슬로 모션으로 느껴지는 어색함. 하지만 또박또박 발음했다. 난 진짜로 반지가 싫어.


놀란 눈의 그녀는 잠시 머뭇하더니 이내 "너하고 싶은 대로 해"하며 토라졌다. 얼마 전부터 손가락의 둘레를 재보더니 역시는 역시군. 다른 변명은 하지 않았다. 액세서리로 종종 반지를 착용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서로의 사랑을 서약이라도 한다는 듯 태연하게 내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짜치듯 자리하는 커플링은 제법 싫어했으니까. 우리가 벌써 서로를 구속할 사이인가? 나는 지금도 누군가의 커플링을 보면 부럽다기 보단 안쓰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넌 어떤 악마에게 포박되어 있니.


그렇게 우리는 커플링을 맞추지 않았고 몇 개월 뒤 헤어졌다. 반지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사람들의 손가락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내 진심과 거짓이 들킬까 싶어 눈을 피하다 생긴 버릇이다. 내 불안함을 온전히 드러내는 손톱 부근을 제외한다면 내 손가락은 형태가 꽤나 예쁘다는 평가를 자주 받아왔고 짐짓 관심 없는 척했으나 나름 손가락에 자신이 있었나 보다. 나는 똑같은 잣대를 대입해 누군가의 손가락으로 각자의 성향과 아름다움을 판단했다. 손가락이 예쁜 사람이 그냥 좋았다.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손가락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반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연애 초반부터 그녀는 언젠가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까르띠에 반지를 끼워주는 프러포즈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요청에 대한 답변은 늘 어물쩡 피해버렸다. 나, 누나랑 결혼까지는 아직 무리인 거 같은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까르띠에 반지의 가격을 검색하고 나면 이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어느 날, 뜬금없는 순간에 그녀가 반지를 맞춰왔다. 까르띠에는 아니었다. 내겐 이름도 생소한 브랜드의 반지를 의기양양한 미소와 함께 건네던 그때의 그녀는 잠시지만 천사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은 보통 성별이 반대 아닌가? 그녀는 눈대중으로도 내 약지의 사이즈를 정확하게 맞춰냈고 정체가 불분명한 보석이 정중앙에 박힌 그 은반지는 그렇게 내 손가락에 정착했다. 성별에 관계없이 아주 아리따운 반지였다.


이후 그녀가 두 세트의 반지를 더 선물했다. 안쪽에 레터링을 새긴 로즈골드 색상의 반지와 광택이 적고 두꺼운 흑색의 반지였다. 전자는 그녀의 취향이었고 후자는 내 취향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와 다투고 나면 술김에, 홧김에 그날 착용한 반지를 보란 듯이 빼내어 내 발 앞에 내동댕이 치는 잔인함을 보이며 세 개의 커플링을 모두 잃어버렸다. 지가 선물한 거면서. 그때의 그녀는 악마로 보였다. 나는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두 개의 커플링을 잃어버렸다. 아니, 잃어버린 척했다.




그녀는 맥주만 마셨다. 그것도 카스나 하이트와 같은 국산 맥주가 아닌 빅 웨이브나 인디카 같은 바에서 마시는 있어 보이는 맥주만 마셨다. 맥주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애주가도 아니었으며 술을 잘 마시지도 않았다. 그냥 바의 분위기에 취해있는 듯했다. 아니, 그 분위기를 동경한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한 것 같다. 하여튼 극적인 사람이라니까.


평소에는 대개 수줍은 미소와 하늘하늘한 단색 투피스만을 장착하던 그녀는 주기적으로 이미지 변화가 필요하다며 나를 불러내 맥주를 마셔댔다. 심리학을 전공한 그녀에게 변화란 술이 주는 위장된 자신감을 의미했나 보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최대한 야하게 입는 것을 즐긴다며 핫팬츠에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는 셔츠를 입은 그녀를 보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더니 악마가 생 로랑을 입었네. 속으로만 말했다.


첫 만남도 그랬다. 불청객으로 우리 사이에 낀 그녀는 그때도 맥주를 마셨고 세 개의 흐릿한 엔젤링을 만들었다. 신비로워 보였던 그녀의 첫인상은 딱 그 맥주 거품이 만든 타원형의 자국 같았다. 나는 어린 자녀의 키를 기록하는 부모처럼 천천히, 하지만 조금의 오차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앤젤링을 내 머릿속에 찬찬히 입력했다. 그날 밤, 그녀가 마키아밸리에 큰 감명을 받고 썼다는 본인의 글을 보여줬고 죄다 비문 투성이인 재미없는 글이었지만 역시 석사는 다르다며 그녀를 치켜세워줬다.


몇 주 뒤 우리는 교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아주 더럽게 헤어졌다. 대부분 천사 같던 그녀도 손가락이 휑해져 갈 때면 악마로 변했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내게 삿대질을 해댄 참 섹시하고 더러운 사람. 그녀는 이별의 통화에 명복을 빌듯 나와 똑같은 여자를 만나 그대로 당하라고 쏘아붙였고 나는 살을 맞은 것처럼 나와 똑같은 여자를 만나 그대로 당했다. 그녀는 정말로 악마였을까.




나는 앞으로도 결혼이 확실한 상대가 아니라면 커플링을 맞출 생각이 없다. 허울 좋은 맹세는 매번 더한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깟 커플링에 너무도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치부하기엔 커플링이란 너무도 많은 것을 상징하는 오브젝트다. 매번 손을 씻을 때마다 빼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사소한 고민에서부터 꽤 큰 다툼 끝에 프로필 사진을 내리듯 반지를 벗겨내는 중대한 장면 모두에서 말이다.


맥주잔에 진하게 남는 엔젤링은 의외로 좋은 맥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앤젤링은 깨끗한 잔과 술을 마시는 순간의 인터벌이 만들어낸다. 사랑은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액체가 아닌 그를 담는 그릇과 시간의 힘이라는 것이다. 꺼지기 직전의 거품을 온전한 사랑의 흔적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키스 마크처럼 남는 자국은 그 자체로 물론 사랑의 형태이긴 하나 잔인한 아픔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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