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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l 04. 2021

거꾸로 걷는 남자

moonwalker

나는 만남에 있어 반가운 내색을 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활기찬 인사를 건넨다는 것은 내겐 꽤나 낯간지러운 일이었고 그냥 그러려니, 자연스럽게 목례와 어중간한 손짓으로 사람을 맞이했다.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잘 지냈어?"라고 안부를 묻기에는 태연하고 따분한 사람.


내 가장 친한 친구 J도 그렇다. 그는 나와의 약속 시간 거의 대부분을 늦었고 사과 한 마디 없이, 뻔뻔하게 귀에 꼽은 에어 팟을 빼지도 않고 말없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KCM이야 뭐야. 또, 뭐가 그리 멋쩍은지 내 옆에선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는 양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지나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병신 같은 놈.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못해서. 쯧쯧.


하지만 J와 나는 매우 친한 사이기에 이를 이해할 수 있는 대범함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J에게 일갈하는 부분은 그의 걸음걸이였다. 나도 못지않게 걸음걸이가 빠른 사람이지만, 녀석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마냥 빠르게 걸었다. 내가 그의 걸음에 특히 열불을 낸 이유는 배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결정한 자잘한, 그러나 관계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사안들에 감사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걸음걸이로 표현했다. 물론 그것이 그의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부러 그럴 사람은 절대 아니니까. 다만 내가 그렇게 느꼈다.


대개 그는 어떤 약속에서도 무엇을 먹을지, 마실 지를 결정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내게 떠넘겼다. 네가 알아서 해. 때때로 그 전가가 너무 심하다고 느껴지는 날이면 나는 너도 한 번 당해 보라는 듯 당일에 약속을 파토내 버리기도 했지만, 우리의 11년은 이 관계를 쉽게 파쇄하기에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체념하듯 치킨, 회, 김치찌개 따위를 파는 가게들을 알아보곤 그 근처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그는 오늘도 마찬가지로 사과 한 마디 없이 내 곁으로 다가왔고 목적지도 모르면서 나보다 빠르게 걸었다.


"J, 좀 천천히 가"


핀잔하듯 쏘아붙이면 그새를 못 참고 툴툴거린다. 이 씨벌 새끼에게 죽빵을 꼽고 싶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지만 초장부터 우리 만남의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실없는 우스갯소리만 던지게 된다. 그 이후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기찬 원래의 J를 발견할 수 있다.




경보 선수를 제외한다면 이기적인 사람들이 제일 빨리 걷는다. 내가 그렇다. 나는 어느 무리에서든 거의 앞장을 서는 사람이고 누군가의 주저함이나 망설임을 기다리는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이다. 팀원들과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 코스, 혼자만의 산책에서도 나는 걸음을 재촉한다. 누군가와의 템포를 맞추는 일은 내게 너무나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어느 한편으론 어떤 풍경이, 이야기가, 상황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는지가 궁금해진다. 목적지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순간에도 이들은 어쩜 이리도 행동이 굼뜰 수 있을까. 의식적으로 그들과의 템포를 맞추려던 나는 어느 순간 잠시 공상에 빠지게 되고 이내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면 그들보다 한참을 앞서 있었다. 나는 괜스레 멋쩍어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척하며 그들을 기다리거나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때는 휙, 마저 가던 길을 걸어갔다. 알아서 잘 따라오겠지.


그러나 그들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그 짧은 기다림이 싫어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이어갔지만 그들은 그 사이 커피를 사러 방향을 틀었거나, 내 뒷모습을 찍거나, 멀리서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그들을 이끈 게 아니라 떠난 것이었다. 그들은 잠시 나와 같은 선상에서 보폭을 맞춰 줬을 뿐. 뒤늦게 이를 알고 나면 얼굴이 벌게졌다. 어느새 나만 혼자 남았네.




혜서는 늘 높은 신발만 신었다. 그녀는 나와의 높이를 최대한 줄이고 싶다고 말했다. 남녀의 이상적인 키 차이는 15cm래요. 그녀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어야 간신히 나와의 폭을 10cm 내외로 줄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미련한 행동이 미웠다. 나와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발걸음이 느려진 게 한심했다. 그냥 업어주겠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그 툴툴거림에 나는 자주 툴툴거리곤 했다.


나는 그녀의 박자를 기다리다 지쳤다. 새벽마다 걸음이 빨라지는 그녀와 느려지던 나는 매번 작은 대화창 안에서 무의미한 다툼을 반복했다.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 그냥 자고 싶었던 나의 주된 변명. 싫어요. 지금 확실하게 해요. 달이 기울수록 강력해지던 그녀의 반박. 에라 모르겠다, 몇 번을 마음대로 잠에 빠지고 난 뒤에는 그보다 더한 불면의 장문 메시지가 업보처럼 숫자 1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건방지게도 그녀를 통제한다 여겼다. 내가 철저한 사랑의 갑이라고 여겼다. 보폭의 차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건 내가 아닌 그녀였으니까. 어쨌든, 나는 싫다고 했으니까. 메트로놈은 내가 아닌 네가 준비해야지. 나는 앞서 나가기만 했다. 아주 가끔 뒤돌아보며 그녀를 재촉했다. 얼른 와. 늦었어. 뭐가 그리 늦었던 걸까.


오늘같이 비가 후두둑 내리는 날이면 내 바지는 뒷단만 푹 젖었다. 큰 보폭과 발을 질질 끄는 버릇 때문일 것이다. 반면 혜서는 등이 홀딱 젖었다. 천둥번개가 치는 날씨에도 우산 하나로 목적지를 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좋다며 헤실헤실 웃는 그녀는 그런 날이면 꼭 몸살감기에 걸렸다. 나는 괜히 어딘가 서글퍼져 겉옷을 챙겨 오지 않은 그녀를 하며 감기약을 사 갔다.


혜서는 맑은 날이면 후다닥 나를 앞질러갔다. 운동화를 신은 날이었다. 하얀 테니스 스커트와 크롭 티를 입고 이 세상의 모든 햇살을 혼자 흡수하겠다는 듯 굴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걸음이 느려졌다. 깡충깡충 뛰어오르는 그녀를 프레임 안에 가두기 위해 땀을 뻘뻘 흘렸다. 혜서야, 가만히 있어 봐. 그제야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향해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긴 머리에 눈, 코, 입이 잠시 가렸지만 분명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그랬던 혜서가 어느 날 주저앉았다. 그녀는 갑자기 모든 동력을 잃은 것 같았다. 오빠, 먼저 가요. 난 좀 쉬었다 갈게요. 그제야 나는 아까운 길을 되돌아 걸어갔다. 그러나 거꾸로 걷는다고 시간이 되돌아가진 않았다.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잡지 않았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서 얼른 이 시간을 얼려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하게도 시간은 우리의 상황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고 우리는 그냥 멈춰었다. 그녀가 울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나를 기다리는 것이, 부르는 것이 힘겨워 쫓아온 나날들에 지쳐버린 듯했다. 마라톤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끈이 끊어졌다. 그래서 나는 묵묵히, 우뚝 서 있기만 했다. 무릎을 구부려야 했는데.


우리의 간격에서 나는 단 한 짝도 물러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면서 내 보폭의 템포만큼은 확실했다. 존중받기를 바랐다. 매번 그녀는 성큼성큼 앞서가는 내 뒤에서 작게 외쳤다.


"오빠, 좀 천천히 가"


총총총 걸음을 재촉하던 그녀는 그날도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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