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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Aug 14. 2021

지포 라이터를 손에 쥔 소년

소년의 소원

 귀찮아. 생일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유난 떨어야 하는 건지. 그냥 동네 제과점에서 산 조막만 한 케이크에 약식으로 꽂은 촛불을 대충 후! 불고 끝내면 되는 거지. 뭐가 그렇게 특별한 날이라고 너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니. 안 그래도 연말이라 바깥은 사람들로 미어터지는데. 그냥 집에서 조용히 넷플릭스나 보면서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 안 될까? 난 그게 더 좋은데. 온 세상이 꽁꽁 얼어버린 12월 28일. 오늘은 어쨌든 '내' 생일이잖아.


 "오빠, 눈 감아봐요."

 

 진짜 유치해. 대충 뭘 준비해왔는지 말 안 해도 얼핏 알 거 같은데. 찬우는 짜증스럽게 눈을 꽉 감는다. 유나는 무얼 그리 분주하게 준비하는지 부스럭부스럭, 참 요란하다. 찬우는 그 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체하며 잠시간 선물이 뭘까, 얄팍한 추리를 시작한다. 슬쩍 실눈을 뜨면 향수, 옷가지, 몇 송이의 꽃, 직접 만든 액세서리, 손편지 중 몇 개가 흐릿하게 보이겠지? 아, 그냥 현금으로 주지. 나 어차피 그런 거 쓰지도 않는데.

   

 그중 찬우가 가장 꺼리는 선물은 편지다. 편지는 쓰는 것도, 받는 것도 애처롭다. 표현이 잦은 발신자일 때는 딱히 쓸 말이 없어서. 그보다 과묵한 수신자의 처지에서는 그걸 읽어야 하는 순간이 너무나 낯간지러워서 그렇다. 그래서 찬우에게 연애편지란 때때로 이기적인 표현 매개체로만 느껴진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기념일만큼은 꼭 편지를 써달라는 잔인한 연인들을 거쳐와서일까. 그의 서랍 한편에 놓인 연보라색 상자에는 흐릿한 출처의 답장이 제법 쌓여있다. 이 많은 걸 언제 다 받았대? 가끔 생각이 나 들춰 읽으면 왼쪽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다. 그래서 다시 뚜껑을 덮을 때는 잔혹하지만 이 종이 쪼가리들을 언젠가 모조리 불태워버리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굳은 다짐을 맹세하기라도 하듯 꺼내문 얇은 담배에 기다란 불을 붙이며 말이다.




 찬우가 어렸을 때, 새해만 되면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억지로 깨워 해돋이를 보러 나갔다. 한 해의 시작을 활기차게 보내야 그해 전체가 운수 대통하다는 근거 없는 낭설을 믿은 당신 때문에 잠이 많은 찬우는 새해 첫날부터 불행했다. 어찌어찌 그는 당신의 독단적인 성격까지는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었으나 소원의 강요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해돋이 구경 뒤, 온 가족이 다 함께 떡국을 먹는 앉은뱅이 밥상에서 당신은 각자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를 공유해보자고 말했고, 찬우는 "저는 딱히 바라는 게 없는데요"라는 뿌루퉁한 대꾸로 "왜 너는 애가 매사에 부정적이냐"라는 핀잔을 듣곤 했다.


 찬우가 성인이 된 이후, 그들은 자연스럽게 해돋이를 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도 구태여 이른 외출을 제안하지 않았으며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를 묻거나 강요하지도 않았다. 1월 1일, 그들은 늦잠을 잘 수 있다는 것만 빼면 다른 평범한 날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지난한 하루를 보냈으며 비슷한 이유로 새해와 맞닿아있는 찬우의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까무룩, 잔소리하지 않는 노인이 되었고 찬우도 그런 심심한 관계를 내심 반겼다. 


 그렇게 찬우는 하루 한 갑의 담배를 피우는 어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늙은 아버지는 뜬금없는 순간 이제 금연하는 게 어떻겠냐고 그에게 권유했다. 나도 그랬지만 담배는 결국 백해무익이었다고. 아들, 무엇보다 엄마가 싫어해. 찬우는 변명하듯 빠르게 답했다. 아빠나 엄마한테 잘해요. 나는 내 여자 친구한테 잘할게요. 원래 몸에 해로운 게 입에 더 달라붙잖아요. 그런 건 끊는 게 아니라 잠시 참는 거라던데. 전 아직 못 참겠어요. 그럴 필요성도 못 느껴요. 유나도 그래요.


 찬우와 유나는 어느 봄의 늦은 밤, 함께 별을 보러 간 장소에서 사랑에 빠졌다. 시작은 유나였다. 벚꽃 구경을 했냐는 그녀의 질문에 찬우는 그보다 만개한 은하수를 보며 대답을 회피했다. 떨어지는 별에 소원을 빈다는 거, 정말 이기적이지 않아? 쟤네 지금 죽어가는 중인데. 찬우의 말에 유나는 마찬가지로 두루뭉술한 답변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렇게 파문이 일었다.




 12월 28일 늦은 밤, 지금 찬우의 눈앞에는 그때와 유사한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다. 그럼 어디 한 번 소원을 빌어볼까. 지금 내 소원은 저기 떨어지는 별처럼, 이 순간이 빠르게 전소하는 거야.


 "눈 떠봐요."

 

 머리가 잠시 어질어질했다. 눈을 너무 질끈 감았나 보다. 좁쌀 같은 빛의 파편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내 줄줄 흐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내고 안경을 고쳐 쓰니 그제야 자그마하게 포장된 상자 하나가 보인다.


 "열어 봐요. 오빠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진짜 고민해서 골랐어요."


 일단 내 소원이 이루어지진 않았군. 기대하는 시늉과 함께 찬우는 포장을 벗긴다. 작은 직사각형 상자 안에는 뜬금없게도 지포 라이터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라이터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금박 장식이 달려있다.


 "오빠, 어차피 담배 못 끊으니까. 기왕 필 거면 멋들어지게 피라고요. 내 눈에 나름 예쁜 거로 골랐는데.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별로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참아내며 찬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라이터라니. 그것도 촌스러운 디자인의 지포 라이터라니. 유나, 진짜 귀엽네. 영문모를 찬우의 웃음에 바보같이 헤- 따라 웃는 그녀를 보며 찬우는 생각했다. 유나야, 나는 지금 이 꿈같은 순간을 급속 냉동하고 싶어.


 그러나 시간은 원래의 속성처럼 그저 그렇게 흘러갔고 찬우는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포 라이터를 가만히, 손에 꼭 쥐었다. 오히려 손아귀 어딘가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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