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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Sep 29. 2021

허기

배터리가 다 됐나 봐요...

사랑이 헷갈리는 순간이 있다. 아마도 신이 내린 운명의 반쪽이라 자부했던 사람에게 받은 가혹한 시련 때문일 것이다. 그때 이후로 내 속의 호감과 애정, 사랑은 얼기설기 서로를 속였다. 날카로운 눈은 자꾸만 헛것을 봤고 예민한 귀는 먹먹한 이명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꿈을 신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득, 아주 뜬금없이 깬 꿈에 나타난 당신을 사랑한다 여겼다. 여러 번 곱씹어 보고 실험해 얻은 확실한 검증법이다.


꿈에 당신이 나타나는 날이면 하루 종일 허기가 졌다. 사랑의 존재 여부는 명쾌해졌으나 당장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그런 날이면 도무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를 몰랐다. 대신 무언갈 마셔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고 가장 안전한 친구 하나를 불러내 당신의 이야기로 잔을 기울였다. 솔직하나 비겁한 용기가 하나 필요했다. 그렇게 얼굴이 벌게지고 나면 그제야 도망치듯 메시지 하나를 전송했다. 내일, 나랑 밥 먹을래?


그러면 시커먼 속마음도 곧장 새빨개졌다. 허공에 둥둥 뜬 대화들 사이로 미세한 진동음을 기다린다. 이쯤이면 30분은 지났겠지 하는 시간도 하필 그때만 되면 눈치 없이 더디게 흐른다. 그렇게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켠 휴대전화에 답장 없이 홀로 덩그러니 남은 메시지를 흘낏 훔쳐보면 강력한 흡연 욕구가 들었다. 에이, 마지막에 이모티콘 하나 붙일 걸. 이거 그냥 미리보기로 안읽씹 하는 거 같은데. 당신은 정말 몸에 해롭다.




사랑은 식사자리에서 탄생한다. 밥심의 한국인답게 사랑도 밥을 통해 동력을 얻는 것이다. 물론 그런 날에는 유독 입맛이 없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몇 술을 뜨다 보면 그보다 더한 감정의 더부룩함이 남는다. 그 포만감이 나를 속인다. 첫 데이트에 공포영화를 보며 내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착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각자의 젓가락질을 유심히 살피며 조금씩 정을 쌓고 있다 믿는다. 어쩌면, 나만.


첫 식사, 메뉴를 고르는 데까지 한참이 걸렸다. 무엇을 먹을지를 끝까지 확정하지 않는 당신에게 간신히 동의를 얻어 낸 괜찮은 식당에서 숨을 골랐다. 오늘은 최대한 조신하게, 우아하게 먹어야 돼. 이 시간을 되도록 길게 늘려놔야 해. 자연스럽게 술을 곁들이기에는 애매하게 이른 시간, 맨 정신에 어떤 화제를 서두로 내세워야 할지를 몰라 두서없이 횡설수설했다. 그날 당신은 그릇의 절반 이상을 남겼고 나는 깨작대기만 했다.


두 번째 식사,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뱉은 메뉴에 격한 찬성 의사를 내비치던 당신 덕에 굳이 타이밍을 잴 필요도 없이 술이 주가 된 밥 약속을 잡았다. 적당히 시끄러운 곳에서 아주 조용하게 술잔을 맞부딪히며 그날 나는 두 시간도 안되어 만취했다. 당신은 한창을 떠들다 내게 밥풀 한 알을 튀겼고 나는 혀가 꼬여 아주 중요한 멘트의 절반을 날려 먹었다. 나는 그날 당신이 입은 옷의 세세한 무늬까지도 기억한다.


세 번째 식사, 야외. 좋은 날씨는 구태여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늘을 군데군데 메운 구름과 우리에게 무심한 행인들만으로도 주고받음은 충분했다. 날이 더워 허기는 금세 임계점을 돌파했으나 젓가락질 몇 번에 차게 가라앉았다. 당신의 옆얼굴을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족히 배가 찼다. 그보단 강렬하게 내리꽂는 햇살에 타들어가는 당신의 오른팔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날은 귀가하자마자 배가 너무 아팠다.




때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만 한동안은 끼니를 만들어 먹었다. 맛있는 음식에 딱히 열을 올리진 않더라도 요리는 창작의 면에서 꽤나 재밌는 행위였다. 아주 사소한 라면 물 조절에도 여러 번 주저하다 끝내 냄비에 한강을 만들어버리던 나도 이젠 뚝딱, 근사한 오늘의 메뉴 몇 가지를 만들 줄 안다. 언제 한 번 우리 집에 놀러 와.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당신에게 건넨 이 말은 여러모로 진심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게 귀찮아졌다. 기진맥진한 저녁에는 인덕션을  힘도, 용의도 없었다. 배달 어플의 UI는 간편했고 자극적이었다. 맵고 짜고 단 섭취 뒤에 그대로 잠에 빠져들면 그만한 길티 플레져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귀한 분에서 더 귀한 분이 되었고 식비는 3배가량 늘었다. 그와 정비례하게 살이 불었고 요새 좋은 일 있냐, 연애하냐는 지인들의 장난이 뒤따랐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여러모로 말이다.


아마 당신과 만나는 빈도 수가 점점 줄어들다 뚝 끊긴 그때쯤부터 일 것이다. 내가 당신의 일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나 싶은 패배감과 가뭄에 콩 나듯 먹이를 던져주는 당신의 기막힌 조련 실력 덕분에 맹렬한 사자 같던 나도 기이하게 배만 볼록 튀어나온 강아지가 됐다. 그 서러운 방치를 잊기 위해 애꿎은 내 소화기관들만 피해를 봤다. 몇 달간 몸에 해로운 것들만 죽어라 먹고 마셔댔다. 독을 독으로 해독하려 했다.


대체 식품처럼 만난 사람들은 나를 더욱 허기지게 만들었다. 배가 부른 소리지만 그들은 내게 그저 인스턴트 같았다. 간이 센 대화들로만 하루 저녁을 과식하다 보니 잠시 내 몸무게를 과신했나 보다. 구토하듯 내뱉는 말실수는 대놓고 속이 보이고 지저분했으나 요식(料食)행위라는 요식(要式)행위는 계산을 도맡는 사람이 정하는 법이라는 것을 알곤 되려 득의양양해졌다. 밥 잘 사 주는 안 착한 오빠.




나는 배가 부르면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는 괴이한 체질이다. 포만에 불쾌를 느끼는 것이다. 차라리 허기졌던 식사 전이 훨씬 나았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사랑도 허기도 뭐든 적당히 채우란 말이 맞았던 것이다. 당신과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얼굴이 빨개지는 체기를 느낀 것은 아마도 이 과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찬우, 나 이거 다 못 먹을 거 같은데"는 당신도 유사한 체질의 사람이었다는 뜻임을 이제는 안다.


그렇게 오랜만에 당신에게 저녁을 먹자는 연락을 보냈다. 이번에도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과하면 안 돼. 다시 한번 속에게 옐로카드를 준다. 그래도 조바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뭐든 상관없어. 동의를 하든 거절을 하든 무시하지만 않으면 돼. 나는 당신과 함께 저작하고 싶은 것이지 씹히고 싶은 게 아니니까. 별안간 숫자 1이 사라졌다. 답장은 없었다. 저녁 내내 배가 아팠다.


까무룩 당신의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어이없게 깨졌으나 표현 못할 그리움이 곧바로 피부로 전달됐다. 아, 내가 당신을 정말 어마어마하게 사랑하고 있구나. 허무하게, 그러나 뚫어져라 휴대전화를 쳐다본다. 전화해. 전화해. 진짜 전화해. 그때, 기적처럼 진동이 울렸다. 꿈인가? 아니다. 당신의 이름 세 글자가 맞다.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간절히 바라면, 정말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전달되는구나.


그렇게 나눈 담소를 재료로 며칠 동안 저녁을 지어먹었다. 그 주의 밤은 단 한순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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