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
이건 "내 꿈에는 난관이 너무 많아"라고 말하는 친구를 담담하(지 못하)게 위로하는 이야기.
봄이 오고 있다며 호들갑을 떠는 만화의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그 시간의 의미는 이제 곧 등교해야 한다는 재촉인 동시에 짓궂은 봄 소풍이 한 달 내로 다가온다는 뜻이었다. 새 학기는 잊고 산 푸릇함이 아니다. 오히려 덜 녹은 땅처럼 미끄덩한 쇳내를 풍긴다. 초봄은 그런 모종의 두려움을 담는 계절이었다.
하늘색 아이리버 mp3를 끼고 무심함을 연기한다. 전조 없이 낯선 3층 교실로 들어선다. 지난해의 절친한 친구들은 모두 다른 반으로 갈라졌다. 공부도 제법 하고 적당히 놀 줄도 아는 그런 쿨한 이미지를 선점하고 싶은데. 이왕이면 맨 뒷자리에 앉으면 좋겠지만 그것보다 약간 앞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
선생님은 학번을 정할 때 성 씨의 초성을 오름차순으로 쓸까, 내림차순으로 쓸까. 설마 키를 재려나? 하필 난 중간에 낀 박 씨고 작년에 비해 한 뼘은 자랐는데도 꽤 큰 애들이 많아 남루해진다. 어수선하게 빈자리에 앉아 쉽사리 서로 말 붙이지 못하는 구성원들 속에서 참담함에도 공간감이 있구나, 표정을 읽었다.
무난하게 가나다 순으로 번호를 받았고 자리 배정이 남았다. 첫 학기니까 순번대로 앉겠지? 하지만 담임교사의 취향이 고약하다. 방법은 이렇다. 매달 뽑는 순서는 바꾸되 여학생이 마음에 드는 남학생을 골라 앉고 싶은 자리에 선착순으로 착석한다. 남학생의 거부권은 없었다. 이걸 올해 여섯 번은 해야 한다니.
내심 가인이가 나를 골라 주길 바랐다. 자리가 사분의 일 정도 채워졌을까, 반에서 가장 키가 큰 여학생의 차례가 왔고 그 친구는 조용히 내 앞에 섰다. 그녀를 따라 삼 분단의 맨 앞자리에 앉았고 뒤이어 한 남자애를 데리고 가인이가 우리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처음으로 속에서 어떤 불길이 치솟았다.
봄 소풍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엄마가 사다 주는 옷만 입어야 하는 나는 용돈을 모아 예쁜 티셔츠 하나를 몰래 장만했다. 버스 맨 뒷자리에서 왁자지껄하게 친구들과 소풍을 떠나는 장면을 그린다. 난 도균이랑 친하니까, 그 근처 정도에는 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와 나란히 앉을 수도 있다.
소풍 전날 밤에는 잔잔한 파도가 흘러들어오는 바닷가에 홀로 서있는 꿈을 꿨다. 찬란한 옥빛 바다에 소나기가 내린다. 나는 우산을 쓰고 가만히 물의 파동을 구경하는데 꿈이 뒤집힌다. 이리저리 귀신의 형상을 한 것들에 쫓기며 쑤욱 잠에서 깬다. 어제 도서관 구석에서 <무서운 게 딱 좋아!>를 본 영향일까.
커다란 대절 버스의 뒤쪽 창가 자리에 앉았다. 혹여 빈축을 살까 조마조마했지만 그런 무언의 주제넘음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걔는 어디 앉으려나? 두리번거리는데 호준이가 불쑥 내 옆에 와 앉는다. 애써 천진하게 주변 친구들과 왕꿈틀이를 나누는데 평소보다 씹는 게 불편하다. 씁쓸한 포도맛이 배어 나온다.
가인이는 여섯 줄은 떨어진 중간 자리에 내 짝꿍인 혜인이와 앉았다. 난 그 동그란 두 개의 뒤통수를 부분적으로만 훔쳐봤다. 버스가 출발하고 차창에는 봄의 기운이 가득하다. 우리 반에서 누가 제일 좋냐는 진실게임이 걸렸다. 남자애 넷이 연달아 가인이의 이름을 말한다. 생김새가 다른 젊음도 결국은 같은 걸까.
말풍선처럼 침묵을 지키던 나는 불쑥 혜인이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왠지 사랑은 소리 내어 말하면 하찮아지는 것 같아서. 꽁꽁 숨긴 마음이 들통나는 게 두려웠을까. 이건 오만인가 오답인가. 의외의 인물 등장에 들떠 이유를 묻는데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원체 멀미에 시달리긴 하지만 봄은 울렁울렁하다.
목적지엔 별 흥미 없는 우리를 태운 버스는 앞으로 어디에 너와 나를 내려줄까.
아무도 모르게 정차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