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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Sep 05. 2021

엄마의 프로필 사진

내가 딱딱한 아들이라 미안해

퇴근 뒤, 약속 시간이 붕 떠 30분쯤 선잠에 빠졌다. 웅웅- 전화가 울렸고 연두색 배경 위에 '엄마'라고 적힌 단어에 한숨을 쉬며 짜증스레 전화를 받았다. 엄마는 내 숨소리만 듣고도 내가 한창 잠에 든 걸 알았다. 아들, 쌀 보내줘? 김치 보내줘? 한동안 그딴 거 필요 없다며 실랑이를 벌이니 나만큼 예민하고 섬세한 엄마는 황급히 마무리 인사를 쏟아내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 "프로필 사진 귀여운 걸로 바꿨더라? 얼른 저녁 먹고 운동해" 내가 이 정도로 차갑고 나쁜 아들이란 걸 적막해진 방 안을 뒤늦게 마주하고서야 후회하듯 깨닫는다.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내가 군대에 있을 때, 그로부터 정확히 18개월 뒤 동생이 입대했을 때만 각각의 시기에 엄마가 생각하는 가장 멋진 아들들의 모습을 게시한 뒤로 쭉 비어 있었다. (지금은 20대 못지않은 몸매를 한껏 자랑하는 본인 사진이다.) 포항에서 7주간 기초 군사훈련을 받던 때 엄마의 인터넷 편지에 쓰인, 과거 내가 정말로 괴로워하며 다니기 싫어했던 월 70만 원짜리 수학 학원을 지나다 문득, 그때 당신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내가 좀 더 행복했을 수도 있었겠다며 뒤늦게 후회한다는 문장을 흐릿한 랜턴으로 비춰 읽었던 적이 있다. 코를 골며 잠에 빠진 동기들 옆에서 나는 흐느껴 우는 소리를 기침으로 감추느라 바빴다. 몸이 힘드니, 멀어지니 마음이 애틋하고 가까워지는 21살이었다.




전역 후, 우리 형제의 프로필 사진 속 여자 친구들의 얼굴을 스크린 샷으로 저장하며 그들을 품평하던 엄마가 미워서 어느 순간부터는 여자 친구가 생겨도 엄마에게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나와 준우는 가끔 "엄마는 왜 그럴까?" 하며 들으라는 듯 엄마의 앞에서, 뒤에서 비아냥 거리곤 했다. 아, 엄마 나 좀 귀찮게 하지 마. 그러나 내 전전전전전 여자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은 아무런 사전 동의 없이 여전히 할아버지의 추도식 영상에 등장한다. 아, 진짜. 쟤랑 헤어진 지 5년이 넘었다니까? 삼촌한테 저 사진 좀 빼 달라고 해.


"찬우야, 엄마 친구들 진짜 촌스럽지 않아? 루주(?)를 진하게 바른 게 무슨 술집 여자들 같잖아. 근데 엄마는 세련됐지?" 가끔 엄마가 당신의 친구들과 지인들, 시기 질투가 명확해 보이는 어떤 아줌마들의 프로필 사진을 보여주며 공감을 바랄 때마다 "아, 엄마 제발 그런 못된 말 좀 하지 마" 하면서도 "우리 엄마가 그래도 그 나잇대에서 꽤 이쁜 편이긴 하지"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없다는 게 왠지 좀 서글퍼.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딱 그만큼의 입에 발린 사랑만 전할 수 있는 딱딱한 아들인 내가 참 한심하기도 하고.


통금시간에 극성인 어머니들 밑에서 자란 여자 친구들 때문에, 지금은 내 메신저 목록에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그 친구들과 달리, 그녀들의 어머니 몇 명이 채 지워지지 못해 흐릿하고 헷갈리는 명칭으로 내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다. "어머님! OO이 데리고 가는 중입니다!" 다급히 외치던 과거가 종종 떠오른다. 그 목록을 가끔 지나치다 보면 의도치 않게 그녀들의 최근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당신의 따님들 사진만큼이나 꽃다발 사진이 많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걸 보는 나는 왜 비참해질까.




S사의 면접 하루 전날, 그러니 내가 Y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 담배를 피우러 나간 타이밍에 준우에게 전달받은 엄마의 갑작스러운 유방암 선고에 내 세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 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그냥 꺼억꺼억 울기만 한 내가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자, 황급히 나를 찾으러 밖으로 뛰쳐나온 그녀가 무릎을 감싸 쥐고 오열하고 있던 나를 억지로 끌어낼 때야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종이 인형처럼 널브러진 나를 침대 위로 눕히며 그녀가 따라 울었다. 그 흐느낌에 죄책감을 느끼며 그대로 네 시간 정도를 기절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바투 다가 온 최종면접보다 더 중요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날 Y가 깨어난 아침 녘까지, 나는 구글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유방암 논문과 기사를 바쁘게 읽었다. 암은 알면 알수록 오리무중에 빠지는 병이었다. 언젠가 Y의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곤 '암 걸린다'는 표현을 함부로 쓰면 안 되겠다며 다짐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제발, 제발, 제발 다른 건 몰라도 항암치료만은, 재건수술만은 안 돼. 면접을 포기했고 황급히 부산행 아침 비행기를 예매했다. 의학을 전공하는 모든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하루빨리 엄마 옆에 있어야만 했다.


엄마는 그래도 초기에 발견했다고, 아직 1기라 괜찮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유방암 네이버 카페가 있다고. 여기 글들을 보면 엄마는 '그래도' 괜찮은 수준이라고. 어쩌면 머리카락을 보존할 수도, 가슴을 잘라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내 여성성을 보존할 수 있다고. 와닿지 않는 수술 후기가 눈앞에 주르륵 펼쳐졌다. 엄마, 뭐가 괜찮아. 유방암이 사람을 섣불리 죽이지 않는 착한 암이라고 누가 그래. 암은 씨발, 그냥 암인 거지. 착하고 아니고 가 어디 있어. 그럼 너네들이 대신 걸리던가. 목 끝까지 꾸역꾸역 차오르는 잔인하고 무책임한 욕지거리들을 참아 내다 가라앉은 집을 더욱 침울하게 만들 말들이 비처럼 쏟아질 거 같아 그날 밤, 또 한동안을 이불 밑에서 숨죽여 울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우리 엄마가 뭘 잘못했길래. 이러는 거야.




엄마가 다시 수영을 시작했다. 그토록 즐기던 골프와 서핑도 곧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간절한 기도가 통하기라도 한 듯 삼성서울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그 유명한 명성에 걸맞게 엄마의 가슴 정중앙에 나타난 6개의 종양을 항암치료와 유방 절제술 없이도 말끔히 삭제했다. 재발률이 높은 만큼 꾸준히 추적검사를 진행해야 하지만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엄마는 머리카락도, 유방도 온전히 지켜냈다. 몇 백만 원이 든 병원비보다 더한 몇 천만 원의 보험금이 나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그 사이, 나는 S사에 최종 탈락했지만 엄마의 쾌유와 더불어 감사하게도 L사에 최종 합격했다. 그렇게 엄마가, 내가 괜찮아진 줄만 알았다.


인정하기 힘들지만 나는 Y와 헤어졌고, 직장인이 되며 삶도 바쁘게 변화했다. 엄마는 그 사이 부산을 떠난 나를 대신해 준우와 유방암을 관리했다. 부산과 서울, 어느 곳에도 아빠는 없었으나 우리 형제는 아들 노릇을 강요당했다. 그래서 잠시간 엄마를 케어해야 하는 시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모든 걸 잃은 것만 같았던 그때는 엄마가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당장 내 두 팔을 잘라줘도 무관하다 느꼈는데. 막상 크게 호전되는 엄마를 지켜보니 내 일상이 꽤 아까웠나 보다. 입사 5개월 차, 어머니가 올라오시는 게 불편하면 호텔을 잡아드리지 그랬어? 팀장님의 충고에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원래 경상도 출신 아들이 그래요.


8월 여름휴가, 오래간만에 부산을 찾았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고 평소 물을 많이 마시는 나는 큰 컵을 찾으려 부엌 선반을 뒤지다 아끼던 컵이 없자 짜증을 부렸다. "어떻게 집에 제대로 된 컵이 하나도 없어?" 엄마가 멋쩍게 말했다. "엄마가 수술 이후에 계속 팔에 힘이 없어서, 좀 무겁고 큰 컵들은 죄다 깨버렸네?" 그 순간, 내가 이 정도로 차갑고 나쁜 아들이란 게 한심해서 눈물이 솟구칠 뻔했다. 애써 태연한 척, 그 표정을 숨기려 연 냉장고에 얼굴을 처박으며 간신히 감정을 다 잡았다. 박찬우, 너 진짜 최악이다.




우리 엄마는 참 예쁘다. 본인이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장난스럽게 짜증 난다고 했지만 우리 엄마,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참 미인이다. 쉰이 넘은 우리 엄마도 내 조용한 기억의 사진관 속에는 아직도 갈색머리의, 삼성전자와 농협 은행원으로 멋진 커리어를 이어가던 젊은 엄마로만 남아있는데. 왜 지금 우리 집 욕실 찬장 한 켠에는 새치용 염색약만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가끔 내가 너무 엇나가는 아들인 거 같다고 느낄 때가 하필이면 텅 빈 프로필 사진의 엄마가 아직도 모바일 세상에 익숙지 못해 띄어쓰기 대신 마침표로 연결된 한 줄의 메시지를 보낼 때인 걸 엄마는 제발 몰랐으면. 그리고 그 메시지 밑에 뒤늦게 따라붙는 강아지 이모티콘 하나에 억지로 숫자 1을 지우며 무너지는 나를 모른 체해줬으면. 비록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지 못하는 무심한 경상도 아들이지만 내 사랑이 온전히 닿았으면.


또, 나의 엄마가 아닌.

준우의 엄마가 아닌.

누나의 엄마가 아닌.

아빠의 아내가 아닌.

조카들의 할머니가 아닌.

우리 가족의 우산이 아닌.

선예, 그 자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하게 닿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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