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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Nov 06. 2021

단발병

머리카락과 바꾸는 것

찰랑찰랑한 긴 검은 생머리. 너는 머리가 너무 길어 말리는 데만 대략 20분이 걸린다. 아침잠이 많은 탓에 자기 전에 미리 머리를 감을지언정, 물기에 젖어 후다닥 지하철로 튀어나갈지언정 딱히 자를 생각은 없어 보인다. 주기적으로 찾아가는 샵의 디자이너 선생님은 가장 이상적인 기장을 스케일 자로 측정해 놓은 것 마냥 너의 머리카락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허리춤까지만 자른다.


포니테일로 묶어도, 올림머리를 해도, 웨이브 펌을 해도 어울리는 전략적인 헤어스타일이기도 하지만 이 긴 머리카락이 나를 가려주고 지켜주는 느낌이 든다니. 가끔 여자애들이 '커튼을 친다'라고 표현했던 말들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그 긴 머리 안에 한 움큼씩 맛난 것이라도 숨겨두었나? 어깨 앞으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목덜미 부근을 훑는다. 여기 아무것도 없는데?


그 앞과 옆, 뒷모습은 렌티큘러로 만들어 팔면 전량 매진이 예상될 정도로 신비롭다. 어제는 너의 앞에서 지켜주고 싶은 순진무구함을 읽었고 오늘은 너의 옆에서 대가가 깎아 낸 오묘한 입체감을 보았다. 그리고 너의 뒤를 훔쳐본 더 먼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려보면 조용히 출렁이는 한 폭의 검은 바다가 나타난다. 우리가 대체 뭐하러 차까지 렌트해서 동해로 가야 해. 여기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유경이 머리를 묶고 온 날, 어중간한 길이의 뒷머리는 제조 결함이 있는 망치 같았다. 단발로 자를 결단력도, 머리가 제법 길어질 때까지 기다릴 만한 인내력도 없는 그녀의 머리는 애매한 거지존에서만 몇 달을 맴돌았다. 그 스타일에 딱히 감흥을 보이지 않는 나에게 끊임없이 오늘 내 머리가 이상하지 않냐 반문하며 말이다. 음,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만 좀 물어. 그러고 나면 꼭 머리카락이 아닌 다른 것들만 짧아지거나 길어졌다.


그만하면 괜찮아. 이 말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뭐든 '그만하면'은 남의 이야기니까. 내 눈에 썩 괜찮다는 게 어떻게 남의 이야기야? 이래서 꼬시는 것보다 관계를 유지하는 게 배는 더 어렵다니깐. 유경이 총알같이 쏘아붙이는 항변은 내 속을 쑥쑥 관통하기보다는 댕강댕강 잘라내는 가윗날 같았다. 그냥 내팽개치고 싶은 너덜너덜한 말들. 그 과감함을 네 머리카락에 대지 그랬어? 또, 속으로만 말했다.


이후 그녀는 대안으로 염색을 결정했다. 하지만 한층 밝아진 머리색은 티 안나는 어중간함을 더 부각하기만 했다. 그녀의 머리는 서울의 어느 곳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건네받은 그녀는 내가 공들여 찍은 사진들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대체 피디가 하는 일이 뭐예요? 편집? 나도 아직 잘 모르는데, 그냥 버티는 거래. 버티면 다 괜찮아진다던데. 네 머리도 그렇지 않을까? 다음 날, 유경의 머리는 검은색이 되었다.




B가 머리를 잘랐다. 한없이 무심한 나조차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길이. 평소처럼 무엇이 변했는지 물어보진 않았지만, 어쩌면 단순히 스타일의 변화를 준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죄책감이 든다. 단발머리, 그게 뭐라고 혹시 나 때문인가 싶다. 어색한 칭찬을 뒤따라 붙인다. 단발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미인이라던데 너는 미인이네. 그 아래에 감춰진 연약한 마음. 과연 어떤 생각들이 싹둑- 어깨 밑으로 떨어졌을까.


아무렇지 않게 만지작거리던 긴 머리카락이 없어지자 그동안 당연하게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기분이 든다. 그냥 관리하기 귀찮아서, 머리를 자른다는 게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B의 단발머리는 나에 대한 무심함을 방증하는 것만 같다. 내가 소신 있는 모습 때문에 너를 좋아 건 맞는데, 왜 정작 내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잘라내는 거야.


1년을 기른 머리그렇게 한 순간 뚝 끊어졌다. 이게 어떻게 병이야? B는 약을 찾은 거 같은데. 원체 남의 말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긴 하 목선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나 왠지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더 단단 사람이 된 것만 같. 진짜 그 헤어컷에는 나에 대한 아무런 의도가 없어? 머리스타일의 변화는 곧 심경 변화라는 사회 통념이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그녀는 무엇을 잘라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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