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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Mar 28. 2022

인간은 지배 없이 살 수 있는가

폭력의 역사

V가 여자 친구와 크게 싸웠다. V가 없는 사이 그녀는 그의 휴대전화를 샅샅이 뒤져봤고 구태여 끄집어내지 않아도 될 내용까지 알게 되었다.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은 (물론 V의 편향적인 의견일 것이다.) 나는 V의 여자 친구가 8:2 정도로 더 잘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안의 내용이 어찌 됐던 아무런 동의 없이 사생활의 영역을 멋대로 침범한 것이 충돌의 근원이니까. 왜 사랑은 항상 '완벽한 소유'여야 하는가.


뭐든 '사랑하니까'라는 말로 퉁쳐서는 안 되는 일까지 우리는 발을 걸고넘어진다. 오랜 기간 우정을 쌓아온 나와 V는 이 주제에 있어서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논쟁을 벌이고 있다. 대체로 나는 사랑에도 갑과 을의 경계가 명확하게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며 V는 그보단 더 로맨티시스트의 성향을 가진 남자다. 그러니 대개 이런 주제에 갑론을박이 나오면 '그래도 남자가'라는 말은 주로 V의 입에서 나왔다.


그랬던 V가 처음으로 내 말에 동의했다.

"걔는 내가 설설 기길 바랐대. 이 워딩 그대로 말했어. 내가 자기한테 왜 '해명'하지 않고 쩔쩔매지 않는지 모르겠대. 아니, 내 휴대전화는 지가 봐놓고서는 왜 나한테 해명하라고 하지? 우리 관계에서 우위를 선점하려는 게 명백해 보이는 말이었어. 나는 어떻게 대응했냐고? 지금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나중에 말하자고 했지.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어.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홀가분하기도 했어."




꽤 오래전부터 인간은 지배 없이 살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왔다. 우리는 남을 억제하고 짓누르는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아주 어릴 적부터 세뇌하듯 입력해왔는데 왜 세상은 여전히 지배의 역사 아래 놓여있는가. 왜 러시아는 무력으로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는 결정을 내렸으며 왜 장애인 단체는 비장애인들의 출퇴근을 방해하면서까지 시위를 이어가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일련의 사건을 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가.


지배의 뒤에는 번영, 아래에는 폐허가 있다. 그 위에는 권력자, 앞에는 위선이 있으며 옆에는 동조가 있다. 그리고 사방의 지근거리에는 그보다 많은 무관심이 있다. 우리는 지배를 모른다. 아니, 이를 악물고 모른 척한다. '이해관계'라는 간편하고 멋들어진 말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애써 이해하려 든다. 겁이 많아서? 잘 몰라서? 아니다. 내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내 근간을 뒤흔들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지배는 얼마나 가까이 있나. 나는 우선 '중도'의 범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뭐든 중간만 가면 된다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중앙에 접근하려 한다. 0부터 100의 숫자가 있다. 여기서 정확한 중간은 50만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는 40부터 60 정도를 중간으로 정의한다. 그러니 내가 조금 부족해도, 넘쳐도 나는 중도라고 말하는 오류에 빠진다.


1°C가 물을 끓게 한다. 1°가 밀물과 썰물을 만든다. 1%가 여론을 만들고 1+가 등급을 나눈다. 한 표 차이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결정되며 한 번의 실수가 되돌아오지 않는 스노우 볼을 굴린다. 그렇다. 지배는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99를 뒤엎어버리는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지배에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된다.




아주 긴 역사의 공백 속에 원시가 있다. 아마도 이 시기의 인류는 헐벗은 채 조악한 창을 쥐고 있는 험상궂은 한 원시인의 이미지로 대표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회책과 과학책에서나 보던 호모- 로 명명되는 이 인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태고의 DNA를 따라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경험한, 폭력의 1차 근원지다. 사냥으로 가족을 먹인다. 그리고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 맞서 싸운다. 이 명료한 작용과 반작용은 분명하게 세상에 나타난 인류의 첫 번째 폭력의 역사다.


그리고 아주 긴 시간 동안 폭력의 역사는 공백이다. 우리가 '잘 아는' 어떤 미싱 링크가 있다. 하지만 이 사이를 공백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폭력에 끝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폭력의 서면적 역사'만 남아있다. 폭력과 지배는 현재 진행형이다. 돌칼을 이기는 청동칼이, 청동칼을 이기는 철 칼이, 철 칼을 막아내는 갑옷과 갑옷을 뚫어내는 창, 더 강한 힘을 위해 속력을 높인 기병, 그들을 저격하는 활, 그보다 정밀한 총, 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는 폭약과 미사일, 이를 막는 방어 미사일과 더 먼 거리를 노리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 핵과 백린탄, 생화학 무기까지. 폭력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폭력의 1차 근원지 이후의 역사에 대해 되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폭력과 지배에 익숙해진 나머지 시대와 평화를 주장하는 실패를 범하고 있다. 어쩌면 그 호모- 이후로 폭력의 역사는 흥하지도 쇠퇴하지도 않은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온전하게 다음 세대에 물려줬기 때문에 혹은 그렇게 추정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유전적으로'라고 말할 줄 아는 인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유전적으로 현시대의 사랑에는 폭력이 필수 불가결하다. 그 결정적 이유는 역설적으로 가족을 만들기 위한 사랑, 외설적으론 쾌락 그 자체의 섹스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웬만해선 물리적으로 가족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폭력과 차츰 멀어졌고 폭력의 역사와는 별개로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만들어 낸 가장 빛나는 성취이자 악취 나는 부작용이다. 우리의 폭력은 애꿎게도 들러붙을 다른 대상을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많고 많은 감정 중에 하필이면 사랑으로 가장 많이 전이되었다. 아마도 선한 동시에 악하며 언제든 강렬하고 파괴적인 힘을 뿜어낼 수 있는 사랑이 폭력과 가장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은 원래부터 하나였다는 듯 결합했고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부착되었다. 그러곤 우리가 소유한 사랑의 성향을 필연적으로 S와 M, 둘 중 하나로만 분류시켜버렸다. 인간과 인간, 세상과 인간 사이에 주종관계를 형성했고 이를 도미넌트(Dominant)와 서브미시브(Submissive)로 이분화했다.



각자의 이득을 위해 주먹질과 발길질로 폭력을 가하던 시대에서 우리는 고작 몇 만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지구가 생겨난 몇 십억 년 전과 비교하면 아주 티끌 같은 시간이 지났고 이 짧은 시간 동안 인간은 한순간에 지구 전체를 황폐화시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극한의 수준으로 폭력성을 끌어올렸다. 폭력은 암암리에 행해졌고 공공연하게 묵인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폭력에 적응하기보단 순응하기 시작했고 사랑 또한 마찬가지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오히려 폭력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사랑은 뭔가 고결하고 가치를 셀 수 없는 감정의 결정체 따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폭력의 역사에 맞춰 사랑의 지배에 대한 명확한 재정의도 당연하게 필요하다. 첫째, 사랑은 단순히 객관화할 수 없는 수많은 정동(情動) 중에서 유별나게 그 포용 범위가 광대한 가치일 뿐이다. 둘째, 그리고 그 감정과 가장 잘 맞아떨어진 샴쌍둥이가 하필이면, 그리고 당연하게도 폭력이던 것이다.




V가 일주일의 공백 동안 그의 여자 친구와 멀어지고 재회했을 때, 그녀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나를 못 본 시간 동안 너는 어떻게 지냈어?"


V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 또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편했어. 이제 나를 지배하려 들지 마."


그녀가 V의 말에 수긍했을 때부터 V는 지배자가 되었다. 나는 그 관계를 축하한다고 말했다. 사랑이 언제나 동등한 가치에서 출발하고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선한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언제나 사랑은 저울 위에 놓여있다. 세상에 산재한 수많은 이별의 아픔과 배신감, 배덕감, 수치심은 모두 끝을 모르고 상승하는 내 무게추 때문이니까. 태초부터 존재한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폭력도, 지배도 아니니까. 오히려 사랑은 언제나 폭력과 지배가 전부니까.


그러니 앞으로도 많이들 싸우시라. 그리고 이왕이면 지배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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