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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Dec 07. 2021

임랑, 함덕, 모항, 동해, 한강

순수

광안리가 익숙한 남구 남자에게 기장은 매번 배다른 형제로 느껴지는 도시였다. '군'이라는 이름 아래 애매한 크기와 소속감을 보이는 동네. 어딘가 낙후된 풍광들 사이에 쓸쓸하게 위치된, 왠지 모르게 부산에서 자발적으로 격리되어 떨어지고파 하는 듯한 외로운 군집. 그 소외가 나와 닮았다.


그런 곳에 자부심을 가지는 소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지런한 20년의 역사 정중앙에는 임랑이 있었다. 스스로가 탐탁지 않아했던 무쌍의 눈처럼 한 겹의 얇고 긴 수평선. 이미 광안리에 너무도 익숙해진 바다 소년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평범한 바다였다.



당연했다. 우리의 시작은 송정이었으며 해운대와 청사포가 그 뒤를 이었고 다대포에서는 #b76dc9 색상의 노을을 두 눈 가득 담았으니까. 까만 밤에는 시원한 공기를 실컷 마실 수 있는 오륙도가 있었고 기장의 낮에는 용궁사와 일광이라는 훌륭한 대체재도 있었다. 그러나 대화가 필요 없는 우리의 나태에는 임랑이 있었다.




대화가 필요한 순간에 나는 함덕에 있었다. 어떤 음악을 틀어도 얼추 들어맞는 배경이 있다는 것이 함덕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맘때 유행하던 야자수와 홍학 모형을 곳곳에 심어놓은 작위적인 바다였으나 낮보다는 밤이 썩 괜찮았던 바다. 해풍을 맞으며 덜덜 떨면서도 두 시간 동안 전파는 끊기지 않았다.


유명 관광지답지 않은 고요한 정물. 기다란 반달 모양의 백사장 끝에 저건 현무암인가? 밤이 짙어 색으로는 판단하기 힘드네. 한 시간 거리의 바다를 건너온 이 파도 소리가 들려? 아니, 휑한 바람 소리만 들려. 별이 많이 떴어. 이래서 사람들이 제주도에 오나 봐. 사진 찍어 보내줄게. 잘 보이지는 않네. 실제로는 더 예뻐.



술 한 잔 안 마셨지만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대로 쓰러져 누우니 또 다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카메라의 화각을 전환해 환한 디스플레이 안에 검은 하늘을 가득 채운다. 인공위성만 보이는데? 나는 낮이 더 좋은 거 같아. 아, 우리는 어쩜 이렇게 다를까. S와 N이 그래서 끌리나 봐. 자석이든 MBTI든 말이야.




영화 <다른 나라에서>를 보고 외국인 관람객들이 많이 물었다는 질문 하나. 한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저 초록색 병은 대체 뭐길래 다들 저것만 마시면 솔직해지나요? 자, 그 답변을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진솔해질 차례야. 소주 앞에 감정 낭비가 어디 있어. 그냥 잠시 덜어 쓰는 거지.


우리는 바다를 보기 위해 모항을 방문한 것이 아니다. 어떤 바다는 그 상징성과 달리 때때로 아무런 오브제가 되지 못할 때도 있다. 좋게 좋게 포장해서 우리는 지금 호캉스를 온 것이라고 여기자. 여기는 죄다 민박집뿐이지만. 아, 그럼 민캉스인가. 킥킥. 세상에 실속 있는 사람만 있나. 나처럼 실없는 사람도 있는 거지.



뭐 달리 할 말도 없으니 술이나 마시는 건데. 어쩌면 서로를 향한 온도가 너무 뜨거워 미지근한 중화가 필요해 그런 걸지도 몰라. 매운 새우깡 한 봉지에 꽤 만족스러운 회 한 접시면 내가 유준상이고 네가 정유미지. 그때 발견한 칠이 조금 벗겨진 검은 페디큐어. 어쩜 이렇게 뜬금없이 사랑스러울 수가 있지.




"망상이면 망상, 추암이면 추암이지. 동해가 뭐야 동해가. 그래서 우리 어디로 가는 건데?"

"나도 몰라. 동해는 그냥 '동해'야."

동해는 그런 곳이었다. 서해, 남해와 달리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바다.


두 개의 노란 서핑 보드가 물살을 가른다. 양양에 비하면 사람이 적다더니. 여긴 사람이 아예 없잖아? 아주 오랫동안 패들링을 했지만 발은 여전히 바닥에 닿는 높이의 수심. 남해안에 익숙한 그에게 동해의 모래는 비단 같기만 하다. 그 속에는 하얀 조개들이 별처럼 박혀있다. 한 바구니에 만 원이라길래 여러 개를 주워본다.



노을이 지는 시간이 되자 동해는 급격히 추워다. 얼른 서울로 돌아가자고 닦달하는 그와 달리 그녀는 오히려 더 먼바다로 향한다. 해안가에 서서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 기어코 작은 점이 되어 파도를 골라내는 그녀를 보며 나는 문득 두려움을 느낀다. 이대로 밀물이 너를 데려가버리면 어쩌지.




다시 한강. 그거 알아? 서해와 맞닿은 물의 흐름 때문에 여름만 되면 여기에는 온갖 것들이 떠밀려 와. 바다와 강의 중간이라 때만 잘 맞으면 돌고래도 볼 수 있어. 내가 서울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곳이. 늦겨울부터 한여름까지, 나는 7개월 간 한강을 바라만 봤다. 함정 같은 시각. 어쩌면 그건 사각이었을지도.


여기 서울 사람들은 죄다 약아빠졌어. 민물고기 같은 녀석들. 옥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백상어인 내가 다 잡아먹어야지. 사실 별것도 아닌 말인데. 서울 남자들이 좋다는 말에 괜히 샘이 나 이빨을 드러냈다. 여의도 한강공원에 앉아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픽- 웃었으니 그거면 됐어.



한강에는 즐거운 사람들만 있는 것 같지. 근데 잘 봐. 여기 은근히 혼자 걷는 사람도 많아. 외로운 사람들은 다 한강에 모이나 봐. 외로운데 여길 왜 오는 거지. 오빠, 그거 몰라? 외로울 때 더 외로운 사람들 보면 그나마 덜 외롭거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어두웠던 한강에 가로등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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