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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Oct 19. 2024

일기예보

버스에서 하차할 땐 환승하지 않더라도 카드를 찍어야 합니다

두 개의 비애가 하강한다. 다른 곳엔 여우비가, 내가 있는 곳엔 작달비가 내린다. 둘 다 우산을 챙기지 못해 몸으로 받아냈다. 수원(水原)은 하늘에 있으나 땅에서 받치는 힘 또한 그에 못지않게 위태롭다. 찰박한 바닥이 유실된다. 어느 하나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그냥 버티는 거래, 버티면 다 괜찮아진대.


언젠가부터 잃음과 잊음은 꼭 필요한 순간엔 나타나지 않았다. 내 권역 안에 가둬 둔 게 무해한 평화뿐이라 그렇다. 분실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연약해져만 간다. 적선하듯 운명에 몇 개를 내어줘도 되는 건데. 어떤 반역심이 든다. 딱히 필요하지 않은 자잘한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잃고 싶지도 않다. 사람도, 사람이 아닌 것도.


이별을 전제한 다툼은 누구에게나 초미의 관심사. 잔악무도한 문답 뒤에 합의된 숙고의 시간은 얼마 가지 못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치밀한 협약조차 허리춤이 댕강댕강 잘려나간다. 그렇게 결함을 명명하게 되고 각자의 거울을 예견하게 된다. 가위를 내밀면 가위가 화답한다. 죽도록 사랑하냐고? 그럴 리가.


예고되지 않은 만남이 성사된다.




환승의 첫 충격은 분신(焚身) 같다. 황급히 냉각 과정을 거쳤지만 끝끝내 반점처럼 남은 화상 자국과 마모된 차가움을 새겼다. 금방 방지턱이 없는 충동으로 연결됐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게 누군가를 폐기하는 사람이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정의 잔혹한 편린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쨌든 어느 하나는 개운함을 가지고 상대방을 떠났고 이기적인 해소 뒤에 나는 그냥 그렇게 남았다. 이별은 패배자만 남긴다더니 아무리 봐도 여기선 나만 진 것 같다. 악취 나는 소문이 역병처럼 돌았고 나 또한 들었고, 봤다. 구조요청이 닿지 않는 깊은 크레바스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창 밖을 예측할 겨를이 없다. 몸에 불이 붙고 발을 헛디뎌 추락해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방법은 구글에 물어도 안 나온다. 주변인의 검색란은 AI보다 못하다.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 말은 무심하지만 날카롭게 나를 관통한다. 전염을 피하려 자가격리를 택하고 침잠한다. 창문마저 닫는다.


정사각형 방 안에서 낱낱이 끄적인다. 매일 기록하면 날붙이 같은 말도 무뎌진다. 이걸 일기라고 부른 적은 없다. 오히려 이건 내 인체의 신비다. 함께 해체하기로 한 전문의는 이제 없다.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성형수술을 한다. 인정할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내가 살 수 있다. 이번에도 당신은 내 구세주가 아니었다.




같은 나라에서 혼자 시차적응 중이다. 자그마한 전용기 한 대가 탑승수속을 기다리고 있다. 한 마디에 하나씩, 세 나라를 순회한다. 께름칙한 마음도 잘 간수해. 언젠가 이 불상사가 그리워지는 날도 올 거야. 고독에 둔감해지면 안 돼. 그래요, 여러분. 우리 아르헨티나와 바하마, 모로코에서 만납시다.


하루에 거짓말을 몇 번 하는지 헤아려봤다. 오늘은 한 번에 그쳤다. 날 로스트 미디어처럼 다루면 그렇게 솔직해질 수 있다. 까맣게 잊는다는 건 모방하기 힘든 일도 아니었다. 격정만 사랑인가, 여럿에게 결례를 범하는 깽판을 처연히 치르고 나면 그만큼 거대한 우정도 생경해진다. 너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겠다.


최대한 느리게 달리는 택시 안에서 산적한 유대와 분노를 계산한다. 이상적인 준거집단보다 이상한 가족이 배는 많다. 그중 오늘 떨어져 나간 몇몇을 애도한다. 날 불신한다는 건 날 훼손한다는 것. 입 아프게 해명하고 싶지 않다. 라디오의 구린 음악을 듣는 건 더 괴롭다. 이어폰을 낀다. 그러면 기사님은 말 걸지 않는다.


다행히도 마음은 그럭저럭 무사했다. 환승은 공짜야, 뭘 모르는 사람이 하는 소리다. 자투리 같은 돈도 늘어난 거리만큼 받는 건데. 그걸 나만 알고 있나? 네 번까지 무료라는 공익 정보에 속지 말게나. 정직하게 시간을 책정하는 미터기와 대시보드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낡은 가족사진 한 장에는 막막한 궁리가 있다.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했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우산을 지팡이로 쓰며 천변을 절뚝거린다. 접이식을 쓰지 않는 사람의 걸음걸이는 이런 모습이다. 한 번도 먼저 잘 잤냐고 묻지 않는 사람에게 날씨를 알려주는 게 내 사랑의 이해였는데. 한쪽 다리가 짧은 의자에 앉아 버티던 기억을 세탁한다.


김밥으로 점심을 메운다. 온갖 속재료를 때려 넣고 안간힘을 써도 김밥은 딱 그 정도 수준인 거 같다. 안전하지만 재미없는 식단. 빽빽하게 출처를 소명하는 투명한 속. 나스카 지상화 같은 그 훤한 단면. 제값 하지 못하는 식으로만 써먹어왔다. 한 줄은 아쉽고 두 줄은 과한 그 특유의 어설픔. 그러게 누가 뻐팅기래.


어쩔 수 없이 나도 시간이 약이라는 만병통치제에 승복했다. 그런 처방이라면 차라리 낫지 않는 게 나을 텐데. 잃음도 엔트로피를 거스르진 못했나 보다. 기억도 부패가 진행됐고 못 잊음의 저주도 하차벨을 누르는 걸 막진 못했다. 쉰 우엉 냄새를 풍기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버스를 기다린다. 깜빡하고 환승을 찍지 못했다.


단말기엔 1,400이란 숫자가 찍힌다. 어쨌든 나는 어딘지 모를 목적지로 가야만 하니까. 예보에 맞는 비애가 내린다. 먹구름을 동반한 추억 몇 개가 번쩍하고 따라붙는데 버스는 여전히 정차해 있다. 구속력 없는 고집이 들끓는다. 근데 걔는 잘 찍었을까?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문이 닫힌다. 청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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