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자이언츠
다시 야구를 보기 시작했다. 삶이 무기력해졌을 때였다. 날 아는 사람들이 지겨워서 일면식도 없는 인파 속에 가만히 파묻히고 싶었다. 서울살이 4년 만에 처음으로 잠실야구장을 찾았다. 소심하게 육성 응원을 따라 하다 보니 다시 피가 끓는 느낌이 들었다. <스토브리그>와 <머니볼>도 뒤늦게 봤다. 이제 난 매일 야구를 본다.
KBO 팬들에게는 시즌이 지옥의 연속이라는 야구.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낌없는 애정을 쏟아내는 야구. 다들 이깟 공놀이에 왜 그렇게 열광할까. 관람 가성비가 좋고 중간중간 음식을 먹고 재밌는 응원 문화가 가득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야구경기가 우리 사는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야구에 만약은 없다. 난 이 명언을 무척 좋아한다. 프로의 세계는 예측할 수 없고 냉정하다. 우리 인생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만년 꼴찌 팀이 1위 팀을 잡을 수도 있고 얼핏 사소해 보이는 실책 하나가 경기를 완전히 뒤집기도 한다. 세이버메트릭스를 비껴간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라는 게 야구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야구는 모두가 공평하게 히팅박스에서 출발해 홈플레이트에 도착하며 또박또박 점수를 낸다. 그 사이엔 정형화할 수 없는 수많은 시놉시스가 세 개의 정사각형 베이스를 연결한다. 단 세 개의 공으로 한 이닝이 삭제되기도, 안타 세 개를 치고도 무득점으로 차례를 넘겨주기도 한다. 나는 왜 야구를 좋아했었나.
지금은 우리 팀의 영구결번이 된,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위협적인 보복성 투구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걸러낸 뒤 곧바로 만루홈런을 쳐냈던 등번호 10번의 선수. 내 고향의 영웅, 영원한 조선의 4번 타자. 그가 세운 나열하기엔 입 아픈 화려한 수상 경력과 수많은 홈런과 안타들. 내 마음을 단단하게 제련했다.
지금은 이미 다른 팀의 전설이 되어 가고 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등번호 47번의 선수. '투수는 귀족, 외야수는 상인, 내야수는 노비, 포수는 거지'라는 말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멋진 공격형 포수. WBC에서 그가 팀을 위해 뜨거운 항의를 분출하고 퇴장됐을 때,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도 그를 욕하지 않았다.
거기서 한참은 커버린 어른이 되고 이제는 한계 투구 수를 넘어선 선발투수의 분투를 보며 가슴이 뛴다. 안정적인 2루타 세이프를 넘어 3루 베이스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돌진하는 주자를 보며 흥분한다. 강습타구를 막아내는 유격수와 포구가 힘든 코스를 허슬 플레이로 잡아내는 외야수를 보며 좌절을 뒤바꾸는 희망을 본다.
타자는 열 번 타석에 올라가 세 번만 쳐도 훌륭한 선수가 된다. 그 3할의 타율을 만들기 위해 일곱 번의 타석은 헛방으로 물러난다. 그 일곱 번의 실패가 있으니까 빛나는 건데. 난 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아내야 한다고만 믿었을까. 볼넷 출루만 해냈어도, 기습 번트를 성공시키는 것만으로도 내 몫은 충분했을 텐데.
다 진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 내리 욕만 먹던 8번 타자가 받아친 직구가 동점 솔로홈런이 되어 저 멀리 날아가는 걸 보면서, 주책맞게 울음이 터졌다. 이래서 다들 포기하지 않는구나. 2010년을 회상한다. 기적 같은 2년 연속 가을야구. 2승을 먼저 따내고도 플레이오프를 좌절했던 그 해. 그때 팀의 상징 같은 슬로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