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Oct 19. 2024

목요일에 봐 !

참 쓸모없는 하루입니다

- 맛있는 거 먹고 좋은 하루 보내세여 :)


메신저를 마무리 짓는데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대화창 안에서만 와닿는 표현이 귀하게 다가오는 하루다. 일주일을 떼죽음 당하는 기분으로 허비한 것 같았는데. 행복이 뭐 별 거 있나요. 맛난 거 먹고 유튜브 보면 그게 행복이죠. 허비보다 허기가 더 중요한, 행복의 역치가 낮은 도돌이표 같은 사람들은 참 귀엽고 가엽다.


집에 가면 또 다른 직장에 출근하는 것 같다며 술 한 잔 하자는 형의 징징거림을 뒤로하고 평소와 다른 길로 퇴근한다.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 있다. 표표하게 남은 여덟 시간의 묵은 감정도 늦기 전에 달래줘야 한다. 나 아니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잘 없다. 그 어느 때보다 고결한 마음 가짐으로 나와의 약속을 지키러 간다.


복잡한 버스를 타기 싫어서 합정역까지 걸어간다. 평소 같았으면 양화대교 위의 보행자 우선 표시를 무시하는 따릉이가 미웠을 텐데. 너른 마음으로 몸을 비켜준다. 저 다리 너머에는 끝내주는 야키토리가 접촉사고를 기다리고 있고 지금 내 귀에는 좋아하는 가수가 방금 막 발표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튀김을 우걱우걱 먹는다. 우걱우걱이란 말은 참 든든한 것 같다. 한가득 주걱으로 푼 쌀밥 같다. 생맥주 한 잔을 금방 해치우곤 하이볼을 주문한다. 단 맛을 배제한 술이 얼마나 달달한 지 모르는 사람은 참 불쌍해. 내가 원하는 속도로, 원하는 양만 딱 채우고 나서면 혼자 왔다는 게 부끄럽기보단 자랑스러워진다.


사랑스러운 교보문고에 간다. 평소 같았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책들에 머무른다. 살까 싶었는데 아까 낮에 오늘의 운세를 검색했던 게 기억났다. 오늘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지출이 생기는군요. 그깟 운명 따위에 휘둘리지 않겠다. 귀퉁이가 살짝 손상된 딱 한 권 남은 시집 하나를 집는다. 내 운의 흐름을 바꾼다.


형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일부러 안 받았다. 무시하니 메시지로 마포에서 끝내주는 곱창을 먹고 있는데 나도 오란다. 안 외로워? 음... 외로운데 좋다. 나를 다독이는 시간이 눈물겹게 귀해서 참 쓸쓸하고 좋다. 지도까지 첨부해 줬지만 GPS의 방향을 바꾸진 않는다. 도심의 작은 공원을 가로질러 위스키를 마시러 가야 한다.


자갈밭에 오천 만원 짜리 스피커를 올려둔 바에 앉아서 발베니 한 잔을 흡수한다. 아, 진짜 이대로 세상이 망하는구나! 환상적이다. 이런 기분이면 다음 샷은 피트가 제격이다. 라가불린으로 입가심을 하고 아드벡을 마신다. 이대로 내가 화학 약품 냄새 속에서 굳어버려도 호상. 근데 아드벡에선 사실 풀내음이 난다.


무화과 디저트를 파는 가게 옆을 지나니 콩팥까지 전달되는 느끼한 치즈버거가 먹고 싶다. 얼굴을 맞대지도 말을 해야 할 필요도 없는 키오스크가 반갑다. 햄최몇? 오늘은 세 개도 거뜬하다. 삭혀온 앙금이 있는 것처럼 전투적으로 달려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햄버거를 발명한 사람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게 이치에 맞다.


흔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집 앞 아이스크림 할인점에서 열 개를 담았다. 비닐봉지를 휘적휘적, 하나를 입에 물고 가는데 엇! 오늘의 운세가 맞긴 맞았다. 만 육천 원짜리 예상치 못한 지출이다. 채 지워지지 못한 숲에 딸기 향이 추가된다. 좋은 하루 보내셨나요? 메시지 한 줄을 보내고 답장을 기다린다. Da Capo.


- 참 쓸모없는 하루입니다. 근데 끝내주네여 :)

이전 21화 스퀴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