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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n 05. 2022

쿠션어의 역설

웃으면서 욕하면 예쁜 말이 되나요?

'유연한 관계'라는 말이 되려 우리 사회를 곪게 만든다.

대화와 대화 사이에 어설프게 낀 완곡어법, 쿠션어 때문이다.


직장인이 된 지 2년 차, 내 화법도 아주 많이 변화했다. 지금도 여전히 말을 막 한다는 소리를 제법 듣지만, 철저히 내 기준에서 보면 29년 인생을 통틀어 지금만큼 예쁘게 말을 해본 적도 없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외람된 말씀이지만~, 커뮤니케이션에 약간의 오류가~, 혹시 괜찮으시다면~ 따위로 두 말할 일을 한 번에 정리하려 드는 것이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미안하단 말이 선행하면 마음이 누그러지나 보다.


하지만 쿠션어는 그 본질을 뜯어보면 그리 좋은 화술이라 볼 수 없는 것 같다. 일단 실은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 마음을 다해 죄송한 일이 있다면 당연히 온 힘을 다해 사과를 건네는 것이 맞다. 다만 내가 저자세를 취하고 들어가야 하는 입장이라는 이유 때문에 말의 앞 뒤에 죄송하지만~ 을 붙이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못하다. 나는 당신에게 죄송한 점이 단 1도 없으니까.


필요 이상의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점도 부담스럽다. 죄송하지 않은 건 둘째치고 내가 당신에게 간절하게 부탁해야 할 일이 아님에도 '처세'를 위해 미사여구가 덕지덕지 붙은 말들을 끊임없이 쏟아내야 하는 것. 얼마 전 선배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언제쯤이면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란 화두가 던져졌다. 정말 위의 두 단어가 없다면 내 하루의 절반은 실어증의 상태로 존재해야 할 것이다.


반대 의견의 힘이 줄어든다는 점도 한 몫한다. '비즈니스 애티튜드'라는 멋들어진 말 앞에 나는 대놓고 무례한 사람들 앞에 끊임없이 말을 빙빙 돌리곤 한다. 어떤 이는 이런 나를 정확한 대척점에 서 똑같이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사이에는 미묘한 갑과 을이 언제나 있으니까. 언제나 약간 아쉬운 사람이 큰 용기를 내 전하는 반론은 쿠션어를 필요 이상으로 함유해야 한다. 그게 우리의 진심은 분명 아닌데.




필요 이상으로 감정 낭비에 과몰입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시대다. 개인주의가 극단화된 탓이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라는 허울 좋은 말 때문에 나도 당신에게, 당신도 나에게 일정선 이상을 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상처의 역치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확실히 과거에 비해 사람들은 자존감에 많이 민감해졌다. 물론 이렇게 변화하는 것이 타당하다만 어딘가 입을 틀어막게 된다. 당신은 진심으로 나를 배려하고 있는가?


쿠션어가 위험해진 이유는 또 다른 시대 변화 때문이다. 예의를 갖추는 건 전혀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예의를 가장한 가스라이팅이 쿠션어를 통해 발현되고 있다는 점이 애석한 부작용이 되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에 있었음에도 '말'이라는 실체를 가지지 않은 수단이 원인이다. 또, 말 때문이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표면적인 방어막 하나로 완곡하게 남을 기만한다. 프레임 밖을 무시한다.


둥글게 말해 말버릇, 더 나쁘게 말해 어떤 동의도, 반대도 표시하지 않은 비열한 회색분자. 책임회피와 중재, 독점이라는 아무도 부여하지 않은 직책을 지레 떠맡은 자들의 자기만족. 남의 감정선을 해치지 않겠다는 본인 만의 약속으로 쿠션어는 되려 남의 감정을 착한 얼굴로 해친다. 쿠션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더욱 악랄하게 이를 악용한다. 예의범절을 가장한 모욕을 쏟아낸다. 쿠션어는 수평 관계에선 잘 쓰이지 않는다.


말 너머의 감정을 다시 한번 헤아려야 하는 피곤함도 있다. 어떤 그룹 내에서만 사용하는 관용어구들을 떠올려보자. 같은 한국어를 해도 몇 가지 애매모호한 단어와 비속어, 사어, 은어들이 뒤섞인다. 당장 '우리'를 위한 편의 때문이다. 이를 다른 그룹에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쿠션어를 생성한다. 전달을 이해하기 위한 제2의 해석본이 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실용성마저 잃어버리는 말들.




가끔 저 사람은 뭘 믿고 저렇게 말을 막하는 거지? 싶은 재수 없는 인간들이 있다. 분명 나 또한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근래 책임자의 입장에서 크게 느낀 점은 되려 사람들은 확실하고 직설적으로 말할 때 더 이해가 빠르며 협조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잔인해져야만 도리어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어준다니. 열심히 쌓아온 탑이 아무렇지 않게 무너진다. 센 말이 세게 박힌다.


그렇게 감정에도 말이라는 동의서를 들이민다. 내가 지금 그런데. 내가 지금 그렇게 느끼는데 이걸 남들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왜? 뭐 때문에? 그게 왜? 뭐가 문제야?라는 날카로운 반문에 닿아야 한다. 그들의 뇌 위로 반드시 착지해야만 하는데. 그 지점이 너무 푹신푹신하다. 내 무거운 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끊이지 않는 질문들과 더욱 숨기고픈 내 마음 사이에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과 그런 나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해 쿠션어를 쓴다. 어느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고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하고 싶은 말이 입안을 뱅뱅 맴도는 데 엉뚱한 말을 한다. 그래서 퇴근 후의 강남, 당산, 합정, 을지로가 바쁜가 보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이 고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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