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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l 11. 2022

미안해요

사과는 어려워

항상 사과가 어려웠다. 한문철 TV처럼 과실도 통계적 수치로 잴 수 있다면 그게 덜했을 텐데. 당신의 잘못이 조금이라도 첨가된 다툼에는 매번 비굴한 사과보다는 승복을 받아내는데 더 애를 썼다. 맞부딪히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했으면서 결국 어떤 관계든 내겐 등수가 더 중요했다. 이 불편한 전투에도 나는 항상 당신보다 앞에 서 있어야만 했다. '우리'를 지속하는 점수판의 포인트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내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저 남 탓을 해 리거나 변명을 해버렸다. 사소한 언쟁 뒤에 복잡 미묘한 기싸움을 벌이다 끝내 툭 끊어버리는 걸 택하는 게 차라리 더 쉽고 잔악하니까. 모든 관계는 일종의 노동이라 치부해버리며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내 편에게 쏘아붙인 진심은 막상 올바른 골인 지점을 한참이나 비껴간다. 그렇게 이미 반절을 넘겨버린 분노는 당연한 위안에 숨으려 한다.


그런 이들에게 위로는 무용하다. 사과하고 싶고, 사과받고 싶은 말은 아무한테서나 나올 순 없으니까. 분명 내가 잘못한 게 없고 네가 잘한 거 없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마음조차 화해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진다. 미안해요. 이 말 한마디가 그렇게나 어렵다.




쉽게 변덕을 부리는 사람이 있었다. 분명 우리는 튀김을 먹기로 했는데 꼭 포장마차 앞에만 서면 우왕좌왕 바쁘게 동공을 굴리며 순대를 찾는 사람이었다. 주황색 천막 아래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아줌마는 사이좋게 먹으라며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새우튀김 하나를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 주었다. 지금에서야 내게 오천 원은 아주 작은 화폐 단위에 불과하지만 고작 그 노란 지폐 하나에 금이 가는 사이가 싫었다.


어차피 고쳐질 사소한 것들이라 안심했다. 그 모든 과정이 이해라는 이름 아래 미움으로 쌓여가는 것을 못 본 체했다. 어쨌든 튀김은 맛있었으니까. 끝끝내 순대에는 손도 대지 않는 나를 따갑고 차가운 눈으로 보는 사람에게 어떤 식의 화해를 건네야 하는지를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에는 내 존재 자체가 죄 같았으니까. 최대한 잘해주고 싶었는데 오늘도 결국 아주 사소한 실수 하나로 내가 네 하루를 망쳐버렸구나. 그게 죄스러웠다.


엄청 좋아한다는 건 대체 얼마나 커다란 감정일까. 변덕이 쉬운 만큼 마음의 저울에도 무게추를 과감히 옮길 줄 아는 사람에게 '엄청'은 애매한 표현이었다. 넌 대체 나를 얼마나 사랑한다는 거야? 그 말에 엄청을 대신할 구체적인 사물들을 찾다 마땅한 게 없어 식탁 위를 검지 손가락으로 푹 눌렀다. 여기 찍은 점을 빼고 난 전부만큼 사랑해. 그 점 안에는 내가 담지 못한 용기가 그득그득했다. 콩알만 해진 울화.


증오보다 사랑이 훨씬 쉬울 때 했던 약속이 하나 있다. 다투고 나면 꼭 사과를 할 것. 그리고 화해의 사랑을 나눌 것. 그것이 어딘가에 처박힌 계약서 상의 몇 번째 조건이었다. 일종의 의무방어전이지! 당신은 깔깔 웃었고 나는 아니었다. 애정은 의무적인 것도 방어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왜. 거절하진 못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선점해버린 순간 우리는 지는 사람이 된다. 어쨌든 내 잘못을 인정해버린 꼴이니까. 이 관계에서 아쉬운 건 '나'임을 직접적으로 증명해버린 마침표니까. 그렇게 이겨먹을 고민으로 차일피일 사과를 미루게 된다. 더 늦으면 진짜 돌이킬 수 없는데. 정말로 나를 더는 안 봐도 괜찮아? 온갖 느끼한 사과 문구들을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은 작은 회복 가능성에도 절박해진다.


사과를 가다듬는 사람의 얼굴은 발갛다. 설령 그것이 내 잘못으로 오인된 억울한 상황이 아니어도 말이다. 목울대가 떨리고 귀가 먹먹해지는 울렁거리는 순간에도 어쨌든 전달한다. 아주 큰 두려움을 다잡고 누군가에게 화해를 가져가는 사람의 용기는 그래서 가치 있다. 물론 지각하지 않는 사과여야 한다. 정확히 그 반대편에서 약간은 차이나는 마음으로 빨개진 사과를 건네고 있는 게 내가 아닌 당신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 모호한 사과 뒤에 자주 붙는 말이 하나 있다.


내가 원래 그래.


원래 그렇다는 말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원래부터 없는데도 사과를 건네는 마음이 무안해서 그런가 괜한 사족이 붙는다. 사과에는 반드시 변명이 없어야 한다는데... 그 멋없는 무안에도 사과를 받는 사람들은 기꺼이 너른 포용력을 보여준다. 네가 그 말을 하는 데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겠어하는 거겠지.




서울 사람들은 월요일만 되면 다들 바쁘고 나빠진다. 명백히 사과를 해야 할 사람들이 되려 윽박을 지르고 가능한 인류애를 지키고자 반추하는 내 노력이 무색해지는 상식 밖의 인간들과 함께 지난했던 지난주와 비슷한 한 주를 시작해야만 한다. 그렇게 퇴근 후 찾은 한강은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예쁜 노을 앞에 잠시 멈춰 카메라를 꺼내 드는 모습을 보면 저들도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구나 싶다.


나는 아직 사과를 받을 준비가 안 됐어.


그 말이 빨간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올 줄이야. 해결이 아닌 또 다른 과정의 문을 하나 더 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분명 늦지 않았는데. 오히려 한 박자 빠른 게 문제가 될 줄이야. 내 사과의 저의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아직은 나를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미안하다는 말에도 적절한 타이밍이 있는 줄 몰랐던 나는 바닥에 떨어진 화해를 어쩔 줄 몰라하며 당신의 주머니에 억지로 밀어 넣기만 했다.


한가득 담기는 순대를 보며 순대에게는 오천 원도 과분한 돈이구나 싶었다. 너무 많은 선을 넘어버린 물가도 그때의 포장마차를 덮치진 못했나 보다. 그럴 줄 알았으면 튀김 같은 건 추가로 시키면 되는 거였는데. 그때는 지갑도 마음도 너무나 가난했다. 조금 빨리, 또 한참 늦게 깨달은 사과의 시간대는 언제나 나를 죄스럽게 한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미안하다는 말을 잘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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