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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Oct 03. 2022

간스유예기엔교 플필헤네카

끝까지 읽고 씨부려라

자, 이번 [바다의 편린]도 아주 역겹다. 이전의 <설거지론 - 사랑이 조롱받는 시대>의 연장선이다. 


간스유예기엔교 플필헤네카.


요 근래 의사/고소득 전문직 커뮤니티를 등지로 떠오르는 말이라고 한다. (사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명칭 되지 않았을 뿐 소득의 고하를 막론하고 남성들에게는 여러 바리에이션으로 십여 년 전부터 나뉜 카테고리의 일종이다.) 여러분은 이 괴상한 단어가 어떤 직업을 뜻하는지 아는가.



간: 간호(조무)사

스: 스튜어디스

유: 유치원 교사 / 유학생

예: 예체능 종사자

기: 기독교 (특히 모태신앙)

엔: NP (Neuropsychiatric) : 신경 정신병적 사고

교: 교사 (특히 초등교사)


플: 플로리스트

필: 필라테스 강사

헤: 헤어디자이너

네: 네일아트

카: 카페 직원


여기에 새로 '왁서'라는 직업이 추가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을 통틀어 소위 '퐁퐁남이 되고 싶지 않은 남성들이 걸러야 할 직업'이라고 축약할 수 있겠다.




<설거지론 - 사랑이 조롱받는 시대>에서 이와 같은 혐오의 단어가 생성된 사회 분위기에 대해 어물쩍 짚고 넘어간 적이 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사회 흐름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젠더 갈등. 한쪽에서는 그럼 폰팔이, 체대생, 헬스 트레이너, 중고 차팔이 같은 직업을 '믿고 걸러야' 한다는 여성들의 의견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는 남성들의 반박에는 논리 오류를 찾을 수 없다. 맞다. 그냥 우리 모두 서로를 혐오하고만 있다.


남성의 젠더를 가진 나도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적어도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만 떠올려봐도 그렇다. 간호학과, 유아교육과 학생은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상당히 비약적인 우스갯소리가 만연했다. 우리만 그랬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애초에 간스유예기엔교 플필헤네카란 단어조차 대두되지 않았어야 할 테니까. 암암리에 나눈 일반화가 젠더갈등을 도움닫기로 딛고 일어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매뉴얼화해서 (실제 전문직들은 현실에서 이런 단어를 쓰지 않는다는 말은 차치하겠다. 적당히 사회화된 인간은 그 어떤 혐오의 표현도 주의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다.) 특정 성별에 포화되어 있는 직업을 일방적으로 비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설거지당하는'걸 경계하기 때문이다. 남녀 관계에 있어 그 어떤 물러섬도 용인할 수 없는 젊은 세대는 균등해야 할 사랑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왜?




이러한 이슈와 관련된 여러 아티클 및 게시물을 읽다가 내린 나만의 흐릿한 결론이 있다. 그 요지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인간 본연에 내재된 DNA와 일부일처제의 충돌, 불을 끼얹는 디지털 환경'


일부일처와 고결한 사랑을 어릴 때부터 사회적으로 체득한 우리는 현재 기가 막힌 아름다움과 화려한 성생활, 쿨한 사고관이라는 외래종을 맞이했다. 그것이 어언 10년은 넘었을 것이다. 디지털 보편화가 그 과정을 가속화했다. 그것은 인간이 수억 년 전부터 내재한 활활 타오르는 본능에 가스통을 던졌다. 그야말로 육식 세계의 귀래다. 남성은 여성을 임신시키기 위해, 여성은 최상위 유전자를 받는 것이 최고인 맹목적인 세상 말이다.



바로 이 부분이 주목해야 할 점이다. 일부다처가 만연했던 시대를 떠올려보자. 물론 일처다부의 나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형태는 대부분 전자로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배경 지식이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왜 그런가 하고 보면 끝까지 생존한 DNA의 힘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어찌 보면 진화와 퇴화를 말해야 할 수도 있겠다. 철저히 현대적 여성들의 관점으로 봤을 때 지금 시대에 임신은 여자'만' 불리한 조건이다.


씨를 뿌리는 남성들에게는 잃을 게 없다. 반면 여성들은 십 수개월을 내성 없는 고통에서 살아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분명 '적응(과학시간에 배운 적응/순응을 떠올려보자)'이라 말해야 함에도 '차별'이라 말하는 스피커, 채널이 많아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른 행태를 보일 뿐이다. 수억 년의 미싱 링크를 뚫고 보존돼 온 유전자가 이런 현상을 뾰족하게 드러냈다. 알파는 수많은 베타/감마/델타를 거느린다는 당연함이 가면을 쓴 것이다.



다만 그것은 쉬쉬해야 한다는 사회의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는 점이 최근과 다르다. 속된 말로 내가 너랑 물고 빨고 하는 것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붓는다는 말은 공공연히 이해하나 암암리에 행해야 하는 것이 근/현대에는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그래야 한다는 사고 자체가 촌스러운 게 됐다. <환승연애>, <체인지 데이즈>, <솔로지옥>, 곧 릴리즈될 <잠만 자는 사이>의 파급력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간스유예기엔교 플필헤네카는 유해한가. 나는 이 사회의 20대 남성으로서 일정 부분 맞다고 생각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냐는 말은 정론이 될 순 없어도 빈약한 근거는 될 수 있다. 내 성급한 일반화를 들려주겠다. 반박해도 좋고 동조해도 좋다. 그 모든 의견은 그 자체로 여러분이니까. 다만 다 읽어보지도 않고 함부로 손가락을 놀리면 죽여버리겠다는 점은 알아두길 바란다.


우선 모든 직업이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사항이 있다. 아하! 그것은 바로 '섹스'다. 결국 남녀 사이의 모든 문제의 근원지. 이 개 같은 피스톤 작용/반작용이 결국 원인이다. 후술 하겠지만 위의 모든 직업들은 그놈의 섹스 빈도수가 높을 것 '같다는' 이유가 크다. 이것은 이제 와서 남성들의 찌질함과 여성들의 자유분방함으로 대비되는 것 같지만 앞서 수십 줄로 설명했듯 DNA와 부딪힌 사고관 변화의 개입이 크다.



직업 피로도를 예시로 들어보겠다. 우리가 흔히 간호사/교사를 거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놈의 업무 강도로 인한 클럽 죽순이 프레임 때문이다. 성녀/창녀로 나누고 싶지 않아도 사실상 물리적 남성들에게는 이게 전부이기도 하다. 물론 속된 말로 우리도 섹스 존나 좋아하는 데 당신들이라고 다르겠는가. 이게 가장 큰 혐오의 문제일 텐데 그것 또한 통계학적 문제다. 어쨌든 남성들에게 섹스는 여성보다 접근이 어려운 행위다.


매혹적인 여성성도 한몫을 한다. 스튜어디스/플로리스트/필라테스 강사/예체능 전공들이 보통 그렇다. 내가 소개팅했던 한 항공승무원 여성은 보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밝고 활기찬 사람에게 누가 호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신체적 장점이 부각되는 필라테스 강사와 직업 자체로 어딘가 신비로움을 풍기는 플로리스트, 감정의 최전선에 있을 것만 같은 예체능 전공들도 유사하다. 이들은 매혹적이니 섹스를 많이 했을 '것' 같다.


자유로움은 어떠한가. 나는 '유학한 여자는 걸러라'라는 댓글에 유독 발작 버튼을 눌리는 여성들을 종종 보게 된다. 물론 그녀들 모두가 공부/워킹홀리데이를 위해 떠난 해외에서 광란의 섹스파티를 즐겼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결정사의 평가 항목에 유학 경험이 배점란에 있는 것처럼 이 자유로움은 또 '문란함'과 연결된다는 사회적 인식을 마냥 부인할 수도 없다.


신앙과 정신의학적 부분은? 나는 두 번 다시 기독교 신자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들의 신앙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일요일과 혼전순결, 십일조 등의 맞지 않는 가치관을 용납할 깜냥이 없다. 정신적 아픔은 더 하다. 일단 내가 너무나 그쪽으로 아픈 사람이라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 얻는 건 안정감보단 오버클락된 불안함이었다. 하물며 일반적인 인간들이 그들을 거부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은 가장 잔인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계급화다. 사실상 이 역겨운 단어를 수면 위로 드러낸 직접적인 장본인. 고소득 전문직 남성이 낮은 계급(철저히 본인의 기준에서)의 여성을 피하기 위한 체크리스트. 당연히 저 직업 종사자들이 모두 그렇다는 뜻은 아니나 어떤 전문적인 배움/기술력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그에 맞게 봉급이 적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나는 설거지당하고 싶지 않아서 저들을 피하고 싶어.


물론 남/녀 동일하게 어떤 직업을 특정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만 다시 '쉬쉬'하는 시대로는 힘들겠지만 어쨌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내 차선이 아니다. 우리는 끝없이 부분 부분을 들춰내고 부끄러워하며 이 모든 말이 무위 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모든 것이 일방적인 관계, 사랑도 갈급하기 때문이라고 느낀다. 느려지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사회에 맞춰 수척해지기만 하는 우리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척박해진 감정의 땅에 자라는 애정은 애처롭기만 하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나 낭만적이고 때로는 너무나 이해 불가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결국 사랑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내재된 DNA와 다가오는 디지털 현상과도 별개다. 그 자체로 우리다.


그러니 사랑의 형태는 마냥의 나를 받아주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뒤늦은 몸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성장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종종 얄밉게 말한다. 당신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게으름 부리는 것 같다고. 당연하게도 열렬한 사랑의 집착은 게으름에서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사소한 어긋남이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맹신하진 않았으면 한다.


그 발전과 오름을 이해하고 나면 비로소 사랑을 선언할 수 있다. 어릴 적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낭만적 사랑을 다룬 동화나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그 이상적인 사랑 이야기들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사랑 외의 것들은 정말로 나머지처럼 느껴진다. 거름망에 남은 나머지가 아닌 지척의 소중한 나머지. 그리고 당당히 그 나머지를 잔여물이나 잔재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는 용기. 우리에겐 그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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