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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Dec 02. 2022

개화시기

찾기: 네가 날 여기서 꺼낼 수 있게 꼼꼼히 읽어야 돼

낮밤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최근 들어 나는 밤 방송에 잘 편성되지 않았고 때마침 월드컵 기간이라 한창 열을 올리며 중계 일정을 따라가는 삶을 산다. 퇴근하자마자 2시간 정도를 자고 새벽까지 축구를 보다 보면 다음날 업무에 어느 정도 지장이 생긴다. 술이라도 마신다? 그럼 끝인 거다. 요즘은 지각도 잦다. 뻔뻔하게도 내가 해놓은 앞전의 수많은 자잘한 일들 때문에 그 늦음 또한 정당하다고 혼자 억지를 부린다.


기온이 급작스럽게 낮아졌다. 얼마 전 한반도 어딘가에서 때 이른 봄꽃이 폈다는 뉴스를 봤다. 올해 한국의 초겨울이 너무나 따뜻한 나머지 식물들이 개화시기를 착각한 것이다. 수능 한파는 옛적의 이야기가 된 지구온난화의 현실이다. 아마 녀석들은 지금쯤 다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정작 봄이 찾아오면 꽃잎을 피우지 못할 것이며 그 여파가 지구 황폐화에 어느 정도 일조하게 될 것이다. 어쩐지 지금의 나랑 비슷하다.


이젠 연애와 결혼이 너무나 당연하게 그룹의 최우선 화두로 오른다. 친구들은 비교적 여성이 많은 회사에 다니는 내가 좋은 사람을 직접 선별해 다리를 놓아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내가 먼저 떠보기도 바빠 죽겠는데. 이분 어때? 이분은? 장단만 맞춰주다 어물쩍 제일 중요한 번호는 넘겨주지 않는다. 귀찮아 죽겠고 때때로 쓸모없는 족속들. 간절히 원하면 테이크 전에 기브가 먼저 선행해야지. 쯧쯧.


다음 경기를 기다리며 본 휴대폰 속 수십 개의 미팅 방, 광고 선전 계정들 사이사이 놓친 몇몇 메시지에 갑작스러운 외로움을 느낀다. 너무나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있음에도 계절에 맞는 답장의 시기를 놓치고야 만 후회스러운 문장(순간)들 때문이다. G가 나랑 연애는 할 수 있어도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 말한 이유는 여기서 명백해진다. 나는 내뱉는 말에 비해 그리 섬세한 사람이 아니며 다정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얼마 전 가고 싶지 않은 동시에 살짝 엿보고 싶은 술자리에 참석했다. 2차에서는 이미 위험한 순간이 여럿 있었고 그러다 나도 모르게 H에게 서른아홉 살까지 짝이 없으면 나랑 결혼하자는 실없는 소리를 엉겁결에 뱉어버렸다. 마냥 농담으로만 한 말은 아니긴 한데... 하하하 그래 그러자~ 하고 파한 자리 뒤 택시를 기다리며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었을 때 목 뒤에 향수를 뿌려놓길 잘했다는 치졸한 생각만 바람과 함께 남았다.


가족 단톡방에 아무런 소식이 올라오지 않는다. 내심 그 상황을 반겼는데. 간간이 누나가 공유하던 정아, 정호 사진도 못 보게 될 줄이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지만 어딘가 공허해져 밤마다 잠 못 이루는 요즘은 혈연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에 기대게 된다. 오히려 당장 무슨 일을 알아내야만 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을 피하고 싶어 먼저 연락하지 않지만.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 만큼 위태로운 상태라는 걸 내가 확실히 알아서다.


어떻게든 최적의 대사를 찾아 건네게 된다. 대화를 피하면서 감명 깊게 읽고 본 콘텐츠 속 명대사를 교묘하게 플러팅으로 바꿔 사용하는 잔악함이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입꼬리를 한쪽으로만 올리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그렇게 담대하지 않다. 내가 그 어떤 부정적 프레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성공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이룩하는 동시에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가장 치명적인 이유다.


Y와는 요즘 만나기만 하면 투닥거린다. 내 공식과 비공식의 경계를 허무는 그녀가 월드컵보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다. 언제나 규정짓는 걸 두려워하는 나는 가장 중요한 사람과 사랑에 뒷걸음질 치는 비겁한 남자다. 그렇다고 널 싫어하는 건 아니야라고 말하는 놈이 무슨 결혼이야. 나는 반짝거림을 포착하는 능력에 비해 겁이 너무나 많은 극강의 J유형. 네가 유독하고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야.


W선배는 세간의 평가와 다르게 좋은 사람에 가깝다. 나도 뭐 그렇게 좋은 취급을 받는 동료는 아니니까. 최대한 색안경을 벗은 채 마음을 조금 열어 보이면 재미난 점을 많이 드러낸다. 나를 막냇동생쯤으로 여기며 귀여워해 주다 찬우는 여자 친구한테 정말 다정할 거 같아라고 빈말이라도 해준다. 저 안 그래요 ㅋㅋㅋ 작게 덧붙이면 몇몇 비슷한 취향으로 이미 나를 파악한 것 같은 눈빛으로 뜨신 밥 같은 미소를 지어준다.


얼마 전 아빠가 서울에 왔다. 가족도 직장 생활하듯 만나야 한다니. 한탄스러웠지만 어느 정도 아들 노릇은 해야 했기에 노량진의 한 곱창집에서 경상도 남자 둘이 어색한 만남을 가졌다. 그는 내게 너도 슬슬 결혼해야지라고 했다. 당신이 시대에 비해 늦게 어린 여자와 결혼했으며 당신의 딸이 시대에 비해 이르게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였을까. 그 마음에 마냥 반항하기에는 나도 이제 제법 나이가 들었다. 마음이 답답해졌다.


얼마 전 L의 결혼 소식에 Q와 나눈 대화. 너 결혼식 갔어? 당연히 안 갔지! 왜? 한 10년 만에 결혼한다고 연락 오는 사람한테 내가 왜? 그건 그러네. 축의금도 안 했어? 당연하지! 너는? 나? 나는 초대도 못 받았는 걸? 당연히 그 상황이 전혀 서운하지 않았지만 한 때 같은 울타리 안에 있던 사람에게 우리가 이렇게까지 참혹해질 수 있구나 그게 아쉬서 Q에게 작게 속삭였다. 네가 결혼하면 나는 축의금 30만 원 할게.


G에게 휘둘리는 순간을 어지럽게 벗어나면 Y가 정확히 반대 성향인 극강의 T로 나를 맞이한다. 그 두 개의 서사가 나를 초라한 유적지로 만든다 싶을 때면 K를 찾는다. 그녀와 SNS를 공유하지 않는 나는 스토리를 통한 발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하고 편안한 관계. 남들은 모르는 K의 이야기를 조금씩 습득해가면서 서로가 절대 연인이 될 수 없다는 걸 확신하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숭고한 애정을 느낀다. 끝까지 비겁해.


올바른 계절을 찾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팀장님이 내게 인생은 다섯 단계로 나뉘는 거 같다고 말한 것 같다. 그가 말한 다섯 단계 중 결혼은 고작 3단계. 그렇다면 나는 아직 레이스의 중간에도 도달하지 못한 뒤쳐진 후발주자. 무한한 애정이 꼭 정답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지금 상황에서 제일 좋은 걸 선택하지 못한다. 그놈의 낭만이 문제다. 꼭 맞는 퍼즐이 어딘가 있을 것이라는 미련한 믿음 때문에 꽃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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