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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n 04. 2020

<스토커>

짝사랑의 시작과 끝은 훔쳐보는 것


사랑 = 도벽



짝사랑의 시작과 끝은 도벽이다. 누군가를 '훔쳐 봄'으로 시작해 '훔쳐 봄'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슬프다. 내 시선이 그저 무지와 혐오감으로만 받아들여진다는 게. 짝사랑은 늘 아프지만,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항상 시선을 거둔 이후의 A/S 과정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u-NVopNDKU


안경 쓴 샌님


[Verse 1]


나도 알아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난 못났고 별 볼 일 없지

그 애가 나를 부끄러워한다는 게

슬프지만 내가 뭐라고



못나고 별 볼 일 없는 건 사는 데 있어 큰 문제는 아니다. 다만 연애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못난 남자 친구, 못난 여자 친구를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슬프지만 인정해야 할 건 인정해야 한다. 나는 못났고, 그래서 그녀는 나를 여러 의미로 부끄러워한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호감을 표시하는 나를, 남들 앞에서 좋아하는 티를 내는 나를, 찌질하게 SNS에 글을 남기는 나를, 부끄러워한다.


처음 네 마디 가사까지는 화자가 어떤 상황인지 확신할 수 없다. 1) 사귀고 있는 상황 2) 짝사랑하는 상황 모두가 선택 가능한 열려있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네 마디로 2번 상황임이 간접적으로 드러나지만 유심히 듣지 않는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빛나는 누군갈 좋아하는 일에

기준이 있는 거라면

이해할 수 없지만 할 말 없는걸

난 안경 쓴 샌님이니까



그녀는 빛이 나는 사람이다. 나와 달리 못나지도 별 볼 일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나를 부끄러워하지만 미안하지만 그런 그녀를 좋아하는 것 또한 내 자유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공평하니까. 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들을 보니 나름의 명확한 기준이 있긴 한가보다. 정확히 이해할 순 없지만 어렴풋이 알 거 같아 딱히 반박할 말도 없다.  그저 안경 쓴 샌님이니까.


'안경 쓴 샌님'이라는 다섯 글자로 단번에 여덟 마디라는 긴 호흡의 가사 끝에 화자를 특정지은 작사 법이 탁월한 포인트다. 안경 쓴 사람이 샌님은 아니고 샌님 모두가 안경을 쓴 건 아니지만 안경 쓴 샌님은 뭔가 찌질해 보인다. 캐릭터를 명확하게 잡았기 때문에 이 짝사랑은 더 처절하게 공감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안경 쓴 샌님이다.




불편한 시선


[Hook]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이렇게 원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바라만 보는데도

내가 그렇게 불편할까요

내가 나쁜 걸까요

아마도 내일도 그 애는 뒷모습만



부끄러운 내 행동은 그녀에게 불편함과 불쾌함을 준다. 그녀를 이만큼 사랑하고 이만큼 원하는데도 내 사랑은 일방통행일 뿐이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지켜보기만 한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내 시선조차 불편한가보다. 나는 나쁜 사람인 걸까? 그녀는 오늘도 휙 하고 돌아선다. 나는 언제까지 그녀의 뒷모습만 쳐다봐야 할까.


노래 제목이 '스토커'인 이유가 이제 드러난다. 좋아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화자는 그저 '바라봄'을 선택한다. 대상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진 않았으나 이 시선은 분명 대상에게 불편함과 불쾌함을 주기 때문에 이 관조는 '스토킹'이 된다. 가사의 은근한 변주 때문에 사랑과 스토킹의 경계가 잠시 모호해진다. 화자는 사랑하는 걸까 집착하는 걸까.



잘 나가는 남자


[Verse 2]


이제 알아 나의 할 일이 무엇인지

다 포기하고 참아야 하지

저 잘 나가는 너의 남자 친구처럼

되고 싶지만 불가능하지

빛나는 누군갈 좋아하는 일에

기준이 있는 거라면

이해할 수 없지만 할 말 없는 걸

난 안경 쓴 샌님이니까



못나고 별 볼 일 없는 내가 맡아야 할 역할을 이제는 안다. 나는 내 사랑을 꾹 참고 포기해야 한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걸 넘어서면 불법이니까. 진짜 스토커가 되는 거니까. 내가 너의 남자 친구처럼 잘 나갔다면 어쩌면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불가능하니까. 난 그저 안경 쓴 샌님이니까.


누군가의 들러리가 된 사람들이 있다. 아주 많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그런 순간을 만든다. 짝사랑이 힘든 이유는 내가 주인공이 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 폭발력 있는 순간의 주인공들을 지켜봐야 해서다. 말없이 울지만 축하해야 해서다. 이 곡이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모두 그 들러리였기 때문이다. 스토커였기 때문이다.



체념해야 될 나의 문제


[Outro]


나는 왜 이런 사람 이런 모습이고

이런 사랑을 하고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고

바라만 보는데도

내가 그렇게 불편하니까

내가 나쁜 거니까

아마도 내일도 그 애는

나도 알아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절정으로 치닫는 감정은 아마도 이 '지켜봄'이 나를 들러리로 만든 것에 이제는 체념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이 짝사랑의 끝에는 나만 패배자로 남았을까. 아마도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도 그녀는 내게 자신의 뒷모습만을 허락할 것이다. 그마저도 불편해하고 불쾌해하겠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미련이 남아 그녀를 흘끗흘끗 훔쳐볼 것이다. 내 눈은 도벽증을 가졌으니까. 우리가 잘 될리는 영원히 없을 것임을 잘 안다. 내 문제를 나도 잘 안다. 근데 이건 내 잘못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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