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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Feb 12. 2024

수시로 낯빛을 바꾼다

pray for you

갤러리를 둘러보다 잠이 깼다.

나, 정말 굉장한 한 해를 보냈잖아?

너무나 위대한 사람과의 연애는 늘 이런 식으로 내 존재를 불현듯 깨닫게 한다.


내가 가지지 못한 큰 눈이 그녀에겐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 뛰어난 취향과 그에 대한 담론이 그녀에겐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어림과 어리숙하지 않은 처세가 그녀에겐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예쁜 글씨체가 그녀에겐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건강한 가족이 그녀에겐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 너른 이해와 뚜렷한 포용력이 그녀에겐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 멋진 자존감이 그녀에겐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용감함이 그녀에겐 있다.


그녀를 만나려면 집 문 밖을 나서 당연하게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오른쪽으로 주로 발을 뻗는다.

우리의 거리는 벌어졌고 만남의 빈도는 줄었지만 배려의 지평은 넓어졌다.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처럼 무작위로 그녀를 떠올린다.


화가 날 때면 혹은 짜증이 날 때면 손톱을 세워 내 손등과 손바닥을 꾹꾹 누른다.

모기 물렸을 때의 민간처방처럼, 스테이플러가 종이를 찍은 것처럼 빨간 자국이 남는다.

복수의 일종으로 아주 살짝 그녀의 손등을 꼬집으면 되려 난리가 난다.

끼약!


내가 노래를 부르면 귀를 막고 달아나거나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같은 "시! 시!"를 연발한다.

내가 흐느적 제멋대로의 춤을 추거나 조금이라도 리듬을 타도 마찬가지다.

그러곤 사람보단 동물에 가까워진다. 낑낑. 왕왕. 야옹. 아우우우우우우울.

나를 놀리는 이상한 가사에 귀여운 멜로디를 붙인다. 바보바보~


대장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한다.

그녀 덕분에 나도 좋아하게 된 마루처럼.

나폴레옹 같이 작은 군주가 내 옆에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부하는 대장 말을 잘 들어야 돼. 안 그러면 반역죄로 죽을 수도 있어.


맹렬하게 전투하고 나면 나는 두려워진다.

언제나 내게만 감성적인 사람은 사과에도 인색하다.

어어- 하다가 넘어버리는 휴전선에 나는 종종 아연실색하며 그녀의 이별선고를 기다린다.

그럴 때면 조용히 내게 시간을 주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누누는 뭐 했어? 모래 파먹었어?"


신진대사량은 몸의 질량과 큰 연관이 있다.

그녀보다 적어도 2배 이상은 큰 나는 뭘 함께 먹을 때면 4배 정도 더 먹는다.

배가 부르면 밥을 쉬면서 먹는 느긋한 그녀와 잔반이 남는 걸 보지 못하는 삼 남매의 둘째.

내가 너보다 적게 먹으면 정말 웃기겠다! 넌 편식도 안 하는데.


드디어 그녀의 부모님 두 분의 성함을 모두 알아냈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했지만, 사랑하면 사는 곳부터 검색해 보는 게 인간인데.

나는 진짜로 그녀가 국정원 집안의 딸 혹은 손녀라고 믿은 적이 있다.

우리 아버지는 용제, 어머니는 선예야. 나처럼 겉만 화려해.


그녀에겐 퍼스널 트렌드 리포터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녀는 유행하는 거라면 죄다 알고 있고 어느 지역을 가든 뭐가 핫한 지를 곧잘 아는 꼬마 힙스터다.

조용한 평일, 고즈넉하고 커피가 맛있으면서 적당히 힙한 곳에서 쉬는 걸 좋아하는 그녀에게 서울은 괜찮다.

사람의 존재 자체에 기력을 빼앗기며 괴로워하는 불편충, 예민충인 내게 서울은 독이다.


쫑쫑쫑. 잘도 걸어 다닌다.

나는 그녀가 가끔 '날아다닌다'라고 표현하는 게 너무 좋다.

작은 다람쥐처럼, 하늘을 피융! 나는 날다람쥐처럼 그녀의 재빠른 동작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니까.

사귀기 전에 나 말고 다람쥐 같이 귀여운 사람을 만나라고 했을 때, 나는 펑펑 울었다. 서른 살인데.


어느새 내 알고리즘을 지배해 버린 그녀의 취향.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장기하를, 침착맨을, 봉제인간을, 김사월을, 윤지영을 어느 정도 좋아하게 됐다.

훨씬 오래전에 쌓아놓은 취향으로 지금까지 '좋아함'의 빚을 지고 있는 거 같다 말하는 그녀.

딱히 뭘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채무는 없습니다. 나는 네가 뭘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거든.


바다는 사람을 자꾸만 뜨겁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수록 산을 더 좋아하게 됐다.

저 멀리 북악산인지 북한산인지가 여러 번 헷갈렸던 날, 추위가 아닌 서늘함을 느꼈다.

힘들 때면 바다를 원하는 그녀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우리는 서로 다른 바다에서 태어난 남과 서의 남녀.


가끔 내가 너무 슬픈 표정을 짓는 거 같다고, 곧바로 알아채는 당신.

믿지 못하겠지만, 아니 지금쯤이면 "또 요란법석 떤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눈부셔서,

혹시 이걸 한 순간에 빼앗겨버리진 않을까 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수시로 낯빛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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