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May 18. 2020

페어링

아이폰 관계론

아이폰을 쓰는 사람들이 다른 브랜드의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름답고 감성적이다. 내 오랜 지론이다. 일단 그런 연구결과가 실제로 있을 뿐만 아니라 비루한 내 현실에서 조차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폰을 쓰는 사람 전부가 매력적인 건 아니지만 내 경우에 매력적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이폰을 썼다.


그래서 한 때 내 이상형은 아이폰을 쓰는 여자였다. 연애 경험이 그리 적지 않았는데도 내 전 여자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아이폰을 쓰지 않았다. 이건 아득한 확률이다. 내 체감상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20대 여성들 중 대략 열에 여덟은 아이폰을 쓰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대충 0.0000128의 확률(약 781만 분의 1)을 가진 연애를 해왔다는 결론을 조심스레 도출할 수 있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약 800만 분의 1이라던데. 나는 어쩌면 한 번은 돈벼락에 맞을 수 있는 천운을 하필이면 여기에 써버린 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내 연인들은 상대적으로 예쁘지 않고 감성적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나. 당연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나는 과분할 정도로 아름답고 착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담뿍 받아왔다. 감성적임을 따지자면 으레 남성들이 멋대로 규정하는 '감성적인 여자'의 범주에서 아주 조금 넘치는, 섬세한 사람들이 좀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들에겐 한 가지 이상한 공통점이 있었다. 무언가 세련되지 못했다. 외적으로 촌스러웠다기 보단 무엇이든 뚜렷한 정체성이 없어 보일 때가 잦았다. 예를 들어 보편적으로 '정상'이라고 이해가 되는 어떤 보이지 않는 기준선이란 게 각각의 장르, 상황마다 존재한다면 그들은 그 기준에 조금씩 미달되곤 했다. 더 세세한 예를 들자면 그들은 가끔 이상한 필터를 씌운 카메라 어플을 사용했고 책을 읽지 않았으며 영화를 싫어했다. 먹고 싶은 음식을 곧잘 말하지 않았고 멜론 TOP 100 차트를 반복 재생으로 들었으며 시간 약속을 자주 어겼고 가끔은 지나치게 이기적이었다.




에어 팟 2가 나오면서 아이폰 X를 쓰는 내 동생은 둘의 호환에 나름 만족하나 보다. 내가 알기론 내 동생 또한 아이폰을 쓰지 않던 그들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인데. 어디서나 변종은 존재하는 법이다. 나는 갤럭시 S8을 쓰면서 선물 받은 에어 팟 1을 쓰기 위해 따로 어플을 깔았다. 충전량을 확인하려면 어플을 켜야 한다는 것 빼곤 딱히 단점이라곤 없었는데 최근 들어 짜증 나는 일이 생겼다. 사람이 조금만 많다 싶으면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태위태하게 서라운딩 하다 결국엔 페어링이 끊어지고 마는 것이다. 내가 갤럭시와 에어 팟을 함께 써서 그런 게 아닌가 지레짐작만 해 본다. 아이폰 X를 쓰는 또 다른 친구가 얄밉게 말했다. 너, 거기에 샤오미 보조배터리까지 쓰면 완벽하겠네. 끔찍한 혼종.


좋아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휴대전화에 눈길이 가게 됐다. 얘는 정말 세련된 거 같은데? 제발 이번만은 아니길. 와, 아이폰의 가장 최신 기종이다. 물질 만능주의는 지양해야 하지만 역시 멋은 돈이 만들어내나 보다. 조금씩 마음속에 호감이 생겨난다. 몰래 SNS를 훔쳐본다. 확실하게 톤 앤 매너를 지키는 피드. 어디 이름 모를 제3세계 영화감독이 제작한 것처럼 보이는 예술 영화를 영문자막으로 보는 걸 보니 미학에 제법 일가견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민음사의 시집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이는 시 한 편과 시크하게 아무런 코멘트 없이 업로드 한 블루보틀의 위치 태그를 단 셀피가 가장 최근의 포스팅으로 나란히 전시되어있다. 확실한 아이폰 감성이다. 나는 더욱 깊게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술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기시감이 들 정도로 신기하다. 이 사람, 마치 나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내 주위를 편안하게 만든다. 나는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인데. 나를 이렇게까지 무장해제시키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다. 나는 실없는 우스갯소리를 연속으로 적중시켰고 이 사람 또한 분명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휴대전화를 눈으로 좇았다. 아뿔싸.




내가 앞서 말한 연구조사의 내용은 이렇다. 실제로 조사에 응한 남녀의 40퍼센트가 상대방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이 첫인상에 영향을 끼친다고 응답했으며, 또 그중 70퍼센트는 아이폰을 쓰는 사람들에게 더 호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여기에 내가 일부로 빠트린 재밌는 통계가 몇 개 더 있다. 남성의 경우 스페이스 그레이 색상을 사용하는 경우 큰 호감도를 샀고 반대로 로즈 골드 색상을 사용하는 경우 오히려 반감을 샀다. 남성 3명 중 1명은 액정이 깨진 휴대전화를 쓰는 사람은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 답변했고 여성들은 액정 상태에는 신경을 덜 쓰나 구형 모델을 쓰는 사람에게 호감을 덜 느낀다고 답변했다. 우리는 이 결과에 굳이 부연설명을 달지 않더라도 그 이유를 이미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끼리끼리 마주쳐서 페어링이라고 명명하는 것일 테다. 유닛 한 짝을 잃어버려도 다른 한 짝을 중고나라에서 사 와 갈아 끼우는 것처럼. 어쨌든 호환만 된다면 어디서 샀든, 누가 썼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갤럭시와 에어 팟을 함께 쓸 수 있었다. 지지직 거리며 서로 마찰을 일으키던 그 둘도 어찌어찌 호환은 됐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아니었나 보다. 나는 에어 팟을 써도 아이폰은 탐탁지 않아했다. 갤럭시를 써도 버즈는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이폰을 쓰는 세련된 당신과 페어링 하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당신과 페어링 되지 못했던 진짜 이유가, 정말로 내가 아이폰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유통기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