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Jun 15. 2020

인생영화

화양영화

얼마 전 Y가 내게 어떤 영화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신이 나서 왓챠 어플을 켰다. 그간 기록해 놓은 최고 평점 영화 중 여러 개를 줄줄 읊어대자 Y가 말했다. "너 상남자라더니, 로맨스 영화 되게 좋아하네?"


신기하게도 그랬다. 딱히 로맨스 영화를 나서서 찾아볼 정도로 선호하진 않는데. 내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작품 중 꽤 많은 수가 로맨스 영화였다. <더 랍스터>를 보며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유죄'라 믿었고 <이터널 선샤인>을 보며 있을 때 잘할 걸, 후회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영화인 <봄날은 간다>는 권태기의 날카로움을 되새기고 싶을 때마다 꺼내봤다. 상남자인 나는 사실 로맨스 영화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어때. 사랑은 다들 하는 건데.


로맨스 영화를 한 편 보다 보면 나도 한 번쯤은 저런 사랑에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단 두 시간 반을 사랑하더라도, 저 주인공들처럼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면 결말이 새드엔딩이어도 뭐, 나름 나쁘지 않겠다 싶은 거다. 극장의 조명이 일순간 환하게 켜지고 암순응된 내 두 눈을 보란 듯이 비웃어도, 까만 스크린 위로 수많은 배역과 스폰서의 행렬이 주르륵 이어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엔딩 크레딧 마저 마침내 빠밤! 하는 소리와 함께 저 어둠 너머로 휘발될 때까지, 몸서리칠 정도로 긴 여운이 남는 그런 영화 같은 사랑이라면 한 번쯤 크게 데어도 괜찮겠다 싶은 거다.




사람들은 왜 서로의 인생영화를 물어볼까. 다들 잘만 대답하던데. 나는 항상 깊게 고민하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매번 다른 영화를 답으로 내놓았다. 어떤 영화든 내 취향에 꼭 맞는 것들은 돌이켜보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겠던데. 그나마 정적이고, 변태적이며, 탐미적이어야 한다는 영화를 평가하는 나만의 세 가지 기준을 정해 두긴 했지만 그중 단 하나도 충족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에 빠진 영화들 또한 셀 수없이 많았는데.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내 취향에 꼭 들어맞는 것들을 가득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대상 앞에 무례하게도 '인생'이란 단어를 붙이곤 한다. 나는 배배 꼬인 사람이라 그 단어 자체가 혐오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인생영화라니. 지들이 뭘 안다고.


J는 여태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영화를 너무나 좋아하고 심지어 사랑하는 나는 깜짝 놀라 되려 그랬던 J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음은 J의 방백. "그냥 이런 거예요. 영화는 어쨌든 픽션(fiction)이잖아요. 사실인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었다 해도 결국 영화만의 상상력이 들어가니까, 어떻게 보면 영화 그 자체가 하나의 허구라고 볼 수 있죠. 팩션(faction)이라고도 하잖아요? 전 그걸 멍하니 들여다보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장르가 됐든 영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으니까. 당장 내 인생을 충실하게 살기도 빠듯한데. 그런 가짜들에 내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저는 서점에 가도 소설 코너는 쳐다도 안 보는 사람이었거든요. 지금도 약간은 그래요."




사람이 사랑을 시작할 때, 우리는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한다고 말한다. 이건 어쩌면 비유가 아닌 묘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들은 세상의 모든 연인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개인적이다. 그러나 영화의 모든 결말은 이 수많은 시발점을 단호하게 무시한 채 단 두 곳뿐인 결승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의 사랑 영화가 참신한 시작을 보여주다 결국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불가항력 때문은 아닐까. 희극 아니면 비극. 뭐가 어찌 됐든 영화의 막은 내려져야 하니까. 우리는 관람석에서 몸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어쩌면 스포일러 방지는 애꿎은 관객만 내쫓는 대비책일지도 모르겠다. 항상 결말은 너무나 예상하기 쉬운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제비뽑기로 고르는 것뿐이니까. 우리는 사랑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종의 운명이라고 말하지만 말이다.


하나같이 영화를 싫어했다. 그냥 네가 정말 보고 싶어 하니까, 같이 가는 거야. 당신들은 얌전히 앉아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고 말했다. 영화가 끝나기 무섭게 무얼 먹을지 재잘대기 바쁜 당신들의 뒤에서 나는 우직하게 내 카메라의 롤을 멈추지 않았는데. 내 취향에 맞춰 우리 인생을 함께 영화로 만들었다면 그때 그 순간도 분명 클라이맥스에 포함되길 바랐는데. 그러나 당신들은 아마 어느 특정 시기 즈음부터 홀로 마음속의 편집실에 앉아 그 답답한 장면들을 주저 없이 잘라냈을 수도 있겠구나, 이제야 인정한다. 같은 영화를 만들어도 나한테는 인생영화, 당신들한테는 그저 그런 삼류 영화였을 수도.


J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요. 제가 언젠가 친구들이랑 <어벤저스>를 보러 간 적이 있었거든요? 한참 영화를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거 뭔가 사람을 벅차오르게 만드네.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이유가 어쩌면 이거일 수도 있겠다. 내가 모르는 감정과 경험을 익숙한 무언가로 치환시키는 거. 한마디로 일종의 대리만족이죠. 하필이면 딱 어벤저스를 보면서 그걸 느꼈어요. 다들 이래서 영화 보는구나. 지금도 뭐, 예술영화? 같은 것들은 이해가 힘들지만요. 사람들이 왜 영화를 보는지 정도는 조금 수긍이 간다는 거죠.”




나는 요즘 영화 한 편을 진득하게 보기가 힘들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니 유튜브니 플랫폼 여기저기를 뒤져도 결국 '영화'로 회귀하던 난데. 고작 두 시간 남짓의 시청시간 왜 이리도 길고 고달프게 느껴질까. 우리의 대화 속에 등장했던 '인생영화' 때문일까. 인생영화를 말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인데. 고작 영화, 고작 인생 앞에서 이토록 고민하며 내 취향을 드러내야 한다니. 


나는 인생영화라는 말이 싫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싫다. 내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지 않으면 고작 영화 따위에 내 인생을 붙이는가. 반대로 어떤 영화는 정말 아름답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한데 고작 내 인생 따위와 그 영화를 어떻게 감히 접목하려 하는가. 괜한 심술이 난다. 컴퓨터 앞에서 일어선다.


우리의 인생 또한 한 편의 영화라기에 나도 나름대로 흥미진진한 각본을 써왔다. 나는 감독인 동시에 주연배우였다. 그러나 때로는 다른 영화의 앵글 안에 우연히 포착된 행인 4 혹은 엑스트라였으며 어느 때는 그저 오브제이기도 했다. 관객들에겐 늘 불친절한 주연, 조연, 단역이었기 때문에 내 영화에서 가장 평점이 높은 배우는 늘 상대역들이었다. 우리는 대화를 하지 않는 대신 대사를 주고받았다. 가끔은 말이 통하지 않아 자막을 달기도 했다. 아무 말 없이 음향으로만 화면을 구성하기도 했으며 아주 드물지만 꽤 여러 번, 서로가 모르는 독백을 편집 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덕분에 어느 날의 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였고 핀 화이트헤드였으며 송강호였다.


아마 지금 이곳도 족히 수만 편은 되는 로맨스 영화의 촬영지였겠지. 한창 열연을 펼치고 있었는데 뒤돌아보니 어느새 모두 철수했나 보네. 여기서는 아무도 "컷!"을 외쳐주지 않으니 촬영이 끝났는지 내가 알 턱이 있나. 근데 이젠 신경 안 써. 원래 좋은 영화는 아무도 모르게 크랭크인 되거든.

매거진의 이전글 예쁘잖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