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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l 01. 2020

예쁘잖아

오늘도 버텨냅니다

나이가 들면서 연애에도 꽤 많은 경험치가 쌓였다. 철없던 학창 시절의 내가 간신히 처치하던 보스 몹들은 지금의 나에겐 그저 그런 잡몹에 불과하다. 그렇게 난공불락의 던전처럼 느껴지던 연애도 딱히 큰 리워드가 없는 일반 사냥터 정도로 전락했다고 여겼을 때쯤, 그러니까 내 연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읽어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쯤, 내 연애 레벨을 초기화시키는 근원적인 질문이 등장했다.


"넌 내가 왜 좋아?"


이 질문에 나는 잠시 동안 스턴에 걸렸다. 내가 왜 좋냐니? 이 질문의 의도가 뭘까? 평소처럼 분석한다. 이건 분명 나를 시험하는 질문이다. 일단은 현명하게 빠져나간 다음 '가드 불가 기술'을 찾아내 카운터를 날리자. 몇 가지 임시 답변을 내놓는다. 너는 성격이 좋아. 말이 잘 통해. 똑똑해. 이 세 가지 답변에 그녀들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럼 너는 '내 성격이 좋지 않았으면, 말이 통하지 않았으면, 똑똑하지 않았으면' 나를 좋아하지 않았겠네? 휘몰아치는 반격기에 내 HP의 대부분이 단숨에 빠져나감을 느꼈다. 이래서 RPG 게임에 레벨은 무의미하구나. 연애에 '숙련'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들과는 많이 다른 여성들만의 개방적인 사고라고 해야 할까. 내 몇몇 여자 친구들은 내가 이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들의 실물을 몹시 궁금해했고 삐지지 않을 것을 약속할 테니(가장 중요!) 인스타그램 ID 만이라도 가르쳐달라곤 했다. 마지못해 계정을 알려주고 나면 그녀들은 아이쇼핑하듯 게시물들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몇 장의 사진만 확인하면 그 사람의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는 듯이 스크롤을 휙휙 넘기다 비교적 자극적인 몇몇의 포스팅에만 잠시 눈길을 주고는 이내 앱을 종료한다. 반응은 제각각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후의 반응은, 삐지든 그렇지 않든, 전 여자 친구들이 '예쁜 사람'이었을 경우가 차라리 나았다는 것이다.


한 번은 내 이전의 여자 친구 하나를 탐색하던 그녀가 조용히 휴대전화를 내려놓곤 말했다. 


"네가 차라리 진짜 예쁜 애들을 만났다면 질투가 덜 했을 텐데"


낯선 답변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곰곰이 돌이켜보다 문득 한 가지 불확실한 가설에 도달했다.


1. 사람은 누구나 비교를 한다. 특히 여성들이 더 그래 보인다.

2. 여성들은 본인보다 더 예쁜 여성들에게 질투심을 느낀다는 사회 통념이 있다.

3.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예쁜 여성들을 더 좋아한다.

4. 남성은 예쁜 여성에게 성적 호감을 느낀다면 여성은 예쁜 여성에게 '워너비'의 모습을 발견한다.

5.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들은 '예쁜 언니'들과 비슷한 어떤 위치 혹은 대우를 원한다.




내가 남성으로서 파악한 "네가 차라리 예쁜 애들을 만났다면 질투가 덜 했을 텐데"에 숨겨진 의도는 '그녀의 상품가치'라고 생각한다. 러프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못생긴 애(?)를 만날 바에는 차라리 나보다 예쁜 애를 만났더라면 지금의 내 가치도 높다는 뜻일 텐데"라고 이해했다는 것이다. 걔와 그녀는 '예쁜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참 안타깝다. 비교의 대상을 떠나 남자의 눈에 그녀는 그 자체로도 '예쁜 여성'의 원관념인데 말이다.


물론 사랑과 연애에 '예쁨'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이를 정확히 인지하게 되면 우리의 '경험치' 또한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모를 나와 같은 편협하고 무던한 남성들에게 이 마법의 답변을 공유하고자 한다. 물론 이 답변 또한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략 95% 정도는 정답에 가까운 말이니 신뢰해도 좋다. 내 경우에는 대개 그게 뭐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한 가지 더 팁을 주자면 이 답변 뒤에 어정쩡한 부연설명이나 변명은 무의미하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달라는 당신들의 연인의 눈을 장난스럽게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넌 내가 왜 좋아?"

"예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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