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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l 03. 2020

환승입니다

실패한 사랑에 예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그랬겠지만 우리의 첫 만남은 유별났고 헤어짐은 슴슴했다. 드라마처럼 그녀의 미래를 마냥 축복하진 않았지만 어디 다락방에 숨겨둔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있겠거니 했다. 추억은 대개 그런 모습으로 죽어있으니까. 그렇게 아주 가끔씩만 꺼내보려 했다. 우리의 슴슴함이 코끝을 맵게 만드는 환승 이별임을 알기 전까지는.


환승의 첫 충격은 온몸에 불을 지르기라도 한 듯 뜨거웠다. 이내 1주 정도의 냉각 과정을 거쳤지만 끝끝내 군데군데 남은 화상 자국과 마모된 차가움을 남겼다. 감정의 증발은 금방 생전 처음 느끼는 충동으로 이어졌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게 누군가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정의 잔인한 파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쨌든 그녀는 본인만의 개운함을 가지고 나를 떠나갔고 이기적인 해소 뒤에 나는 그냥 그렇게 남았다. 꽤 아팠나 보다. 꼬박 1년을 앓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재생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 1년의 시간 동안 보상심리로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래서 죄책감을 느꼈고 그 감정은 상대방에게는 이유모를 찝찝함으로 등가교환됐다. 그 무렵 나는 도저히 새로운 연애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사랑과 비슷한 무언가를 분명 느꼈지만 항상 분출의 바로 직전에는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란 슬픔에 압도되었다. 기억은 날카로운 크레바스였고 나는 여전히 구조요청이 닿지 않을 만큼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별은 패배자만 남긴다더니. 아무리 봐도 나만 진 거 같았다. 소셜 미디어를 필두로 아주 역한 소문들이 전염병처럼 돌았고 나 또한 명확하게 들었고, 봤다. 그럼에도 내 심장 근처 어딘가를 가장 아프게 쥐어짠 건 그 환승도, 환승역도 아닌 제삼자들의 무관심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별에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어"라고 말했다. 어쩌면 나를 향한 일말의 동정심을 감추기 위해 건넨 충고일 수도 있겠다. 그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고 그 말은 그만큼 무심하지만 날카롭게 나를 관통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뼈아픈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관련된 모든 사물과 사람들로부터 자가격리를 택하며 끝없이 침잠했다.




문득 그때를 회상하게 된다. 귀가 길의 버스 안, 그날의 나는 유독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고 꽤 오랜 시간 술 냄새를 폴폴 풍기는 아저씨 앞에서 휘청거리고 있었다. 때마침 그녀에게 전화가 왔고 전화를 받으려는 순간 하필이면 빠른 속도로 방지턱을 넘는 기사님의 난폭 운전 때문에 들고 있던 커피를 왕창 쏟았다. 오늘 하루 재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금방 재수가 없을지는 몰랐다. 우리는 십 분 남짓 통화를 했고 가라앉아있던 그녀의 목소리는 그 사이에 혼자 방지턱을 몇 개나 넘은 듯했다. 꾸역꾸역 잘 참는 듯하더니 헤어지자는 말을 마치고 나서는 되려 본인이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막상 나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는데 말이다.




결국 나도 '시간이 약'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승복하게 되었다. 용한 의사도 고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불치병도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었나 보다. 이별 후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서서히 부패되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맛있게 밥을 먹었고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으며 간간이 들려오는 그녀의 소식에도 크게 동요되지 않았다. 물론 그때도 버스를 타면 어느 특정 구간에서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환승입니다!"라는 소리에 지금도 가끔 화들짝 놀라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내가 살 수 있다. 목적지가 달랐던 우리는 서로 다른 버스를 타야 했다는 것을. 때마침 누군가 하차벨을 눌렀다. 나는 재빨리 출구 쪽에 섰고 버스는 곧 멈춰 섰다. 정류장으로 폴짝 뛰어내린다. 달콤한 밤공기를 있는 힘껏 들이킨다. 아, 속 시원해. 저 멀리서 갈아타야 할 버스가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 그때서야 알아챘다. 아직 가야 할 길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환승을 찍는 걸 깜빡했다는 것을.


새로운 버스에 오른다. 단말기엔 1,200이란 숫자가 찍힌다. 비록 환승에는 실패했지만 어쨌든 나는 목적지로 가야만 하니까. 버스는 뒤따른 승객들을 마저 태우기 위해 여전히 정차해 있다. 근데 걔는 잘 찍었을까?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문이 닫힌다. 청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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