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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n 18. 2020

외로움과 마주보기

고독은 반등이 된다

요즘 들어 많이들 외로운가 보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발산했지만 나는 오롯이 느꼈다. 매번 '외로움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던 나를 이상하게만 보던 당신들의 눈에서 언젠가의 나를 읽었다. 지나치게 이성주의자인 그대들 답지 못하다. 입이 무거워야 할 술자리에서는 괜한 충고를 하지 않기로 했다. 며칠 뒤 나는 언젠가 메모장에 옮겨 적어 놓았던 김소연 시인의 글 몇 문단을 당신들에게 전송했다.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혼자 잠을 자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그녀를 친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외롭지 않느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그녀는 친구의 질문을 곱씹는다. 외로운지 그렇지 않은지. 그러곤 대답한다. 외롭다고. 외롭지만 참 좋다고. 친구는 그게 말이 되냐는 눈빛이다. 괴짜를 바라보듯 씨익 웃으며 그녀를 본다. 그리고 연애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사랑이 얼마나 활기를 주는지를 설파하며 못내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바로 그때, 그녀는 즐거운 토론을 시작할 마음으로 자세를 고쳐 앉는다.


 어쩌면 친구에게 외롭지 않다는 대답을 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의 도식에 의해서라면, 그녀의 면면은 외롭지 않은 쪽에 가까운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정확한 대답을 하고 싶어서 외롭냐는 질문에 긍정을 할 수밖에 없다. 외롭다. 하지만 그게 좋다. 이 사실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건, 외로운 상태는 좋지 않은 상태라고 흔히들 믿어온 탓이다. 그녀는 외롭지만 그게 참 좋다. 홀홀함이 좋고, 단촐함이 좋고, 홀홀함과 단촐함이 빚어내는 씩씩함이 좋고 표표함이 좋다. 그래서 그녀는 되도록 외로우려 한다. 그게 좋아서 그렇게 한다. 그녀에게 외롭지 않은 상태는 오히려 번잡하다. 약속들로 점철된 나날. 말을 뱉고 난 헛헛함을 감당해야 하는 나날. 조율하고 양보하고 희생도 감내하는 나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알람을 굳이 맞춰 놓지 않고 실컷 자고 일어나는 아침, 좀 더 이불속에서 뭉그적대며 꿈을 우물우물 음미하는 아침, 서서히 잠에서 벗어나는 육체를 감지하며 느릿느릿 침대를 벗어나는 아침이다.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사과 한 알을 깎아 아삭아삭 씹어 과즙을 입안 가득 머금고, 찻물을 데우고 커피콩을 갈아 까만 커피를 내려서 책상에 앉는 그런 아침이 좋다. 오늘은 무얼 할까. 영화를 보러 나갈까. 책을 읽다가 요리를 해볼까. 혼자서 자기 자신과 상의를 하는 일. 뭐가 보고 싶은지, 뭐가 먹고 싶은지를 궁금해하는 일. 그러면서, 그녀는 소소한 마음과 소소한 육체의 욕망을 독대하고 돌본다. 외롭다. 그러나 오랜 세월 매만진 돌멩이처럼, 그런 외로움은 윤기가 돈다.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시간을 "매끈한 시간: 해야 할 일을 그만두게 할지도 모를 약속도, '해야 할 일'도 없는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외로움이 윤기 나는 상태라는 실감은 그녀에게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외로울 때면 쉽게 손을 뻗어 아무에 가까운 사람과 애인이 되었던 시절도 있었고, 외롭다는 사실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늘 누군가와 연결되어 아무 말이든 나누어야 잠이 들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고, 혼자서 식당에 찾아가 밥을 먹는 일이 도무지 어색해서 차라리 끼니를 굶던 시절도 있었다. 연락처 목록을 뒤져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지만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나날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히는 게 두려워 누군가가 그녀를 생각하고 있다는 확인을 해야 안도가 되는 나날도 분명 있었다. 누군가와 연결이 되어야만 겨우 안심이 되던 그 시절들에 그녀는, 사람을 소비했고 사랑을 속였고 그녀를 마모시켰다. 사랑을 할수록, 누더기를 걸친 채로 구걸을 하는 거지의 몰골이 되어갔다. 사랑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허접하고 경박한 외로움이 사랑을 그렇게 만들었다. 서로를 필요로 하며, 부르고 달려오며, 사랑을 속삭였던 시간들은 무언가를 잔뜩 잃고 놓치고 박탈당한 기분을 남기고 종결됐다. 그래서 지나간 사랑을 들춰보면 서럽거나 화가 났고, 서럽거나 화가 난다는 사실에 대해 수치스러웠다. 어째서 사랑했던 시간의 뒤끝이 수치심이어야 하는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는 사랑의 숭고함보다 혼자의 숭고함을 바라보고 지낸다. 혼자를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 가끔 거짓말조차 꾸며댄다. 선약이 있다며 핑계를 대고 약속을 잡지 않는다. 아니, 거짓말이 아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과 놀아주기로, 스스로에게 신중하게 오래 생각할 하루를 주기로 약속을 했으므로 선약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와 놀아주기로 한 날이라서 시간이 없어요’라는 말은 안타깝게도 타인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하다 하다 지치면 한 달 정도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에 가족이나 친구가 함께하는 것을 두고, 그녀는 농담처럼 회식 자리에 도시락을 싸 들고 가는 경우와 같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관광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인간관계로부터 언플러그드하러 떠나는 것이다. 오롯하게 혼자가 되어서, 깊은 외로움의 가장 텅 빈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여야 할 차례다. 감정 없이 텅 빈, 대화 없이 텅 빈, 백지처럼 텅 빈, 악기처럼 텅 빈. 그래야 그녀는 좋은 그림이 배어 나오는 종이처럼, 좋은 소리가 배어 나오는 악기처럼 될 수 있다.


 외롭다는 인식 뒤에 곧이어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뒤따르는 일을 그녀는 경계한다. 잠깐의 어색함과 헛헛함을 통과한 이후에 찾아올 더없는 평화와 더없는 씩씩함을 만나볼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어딘가에서 감염된 각본 같아서다. 슬프다는 인식 뒤에 곧이어 슬픔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뒤따르는 일 또한 그녀는 경계한다. 역시 어딘가에서 감염된 각본 같기만 하다. 외로움에 깃든 낮은 온도와 슬픔에 깃든 약간의 습기는 그저, 생물로서의 한 사람이 살아가는 최소 조건이라는 걸 그녀는 잊지 않고 싶다.


 요즘 그녀는 외로울 시간이 없다. 바쁘다. 탁상 달력엔 하루에 두 가지 이상씩 해야 할 일이 적혀있다. 어쩌다가 달력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지 않은 날짜를 만나면, 그 날짜가 무언가로 채워지게 될까 봐 조금쯤 조바심도 난다. 바쁠수록 그녀는 얼얼해진다. 얼음에 한참 동안 손을 대고 있었던 사람처럼 무감각해진다. 무엇을 만져도 무엇을 만나도 살갑게 감각 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 다소 질 나쁜 상태가 되어 있다. 쉽게 지치고 쉽게 피로하다. 느긋함을 잃고 허겁지겁한다. 신중함을 잃고 자주 경솔해진다. 그녀는 그런 자기 자신에게 불만이 부풀어 오르는 중이다. 그래서 매일매일 기다린다. 오롯이 외로워질 수 있는 시간을. 오롯이 외로워져서 감각들이 살아나고 눈앞의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고 지나가는 바람의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녀만의 시간을.


 외로워질 때에야 이웃집의 바이올린 연습 소리와 그 애를 꾸짖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모르는 사람들의 생활에 빙그레 웃을 수 있다. 외로워질 때에야 그녀가 누군가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떤 연결은 불길하고 어떤 연결은 미더운지에 대해 신중해질 수 있다. 안 보이는 연결에서 든든함을 발견하고 어깨를 펴기 시작한다. 골목에 버려진 가구들, 골목을 횡단하는 길고양이들, 망가진 가로등,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들에 담긴 알 듯 말 듯한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당신들의 답장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달랑 물음표 하나를 보냈다.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있으니 내일 읽어보겠다고 했다. 누군가는 지금까지도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나와 같다고 했다. 나는 당신들에게 외로움을 마주 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랑'임을 말하고 싶어 이 글을 보냈다. 사랑에 실패해서, 사랑이 지루해서, 사랑에 무지해서, 사랑이 서툴러서 외롭다던 당신들에게 외로움과 사랑은 결국 이음동의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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