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Jul 04. 2020

<일과 이분의 일>

반쪽!


투투요?



필자는 94년생이다. 우리 세대는 아마 비슷하겠지만 나는 '투투'하면 '투투 데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 당시 왜 유행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귄 지 22일을 맞이한 커플들은 각 반을 돌아다니며 220원이나 2200원을 요구했다.


<일과 이분의 일>은 1994년 4월 30일에 발매된 음악이다. 그러니 이 당시의 음악 시장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나는 21세기에 와서야 이 음악을 접했고 당시 '레게'라는 특정 국가의 색이 짙은 장르로 대성공을 거뒀다는 점이 가장 신기했다. 90년대를 모르는 90년대 생에게 한국 대중가요의 '황금기'는 전설 같은 말이었으나 본 곡을 듣다 보면 왜 그때가 전설 같은 시대였는지 만장일치로 동의할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지금도 대학가의 복고 콘셉트의 술집에서 이 음악이 흘러나오면 머릿속에는 "반쪽!"하고 몸을 접는 안무가 연상되는 걸 보니 말이다. 명곡은 시대를, 세대를 아우른다는 게 마냥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https://www.youtube.com/watch?v=9jGnozOVOS8




반쪽짜리 이별


[Intro]


멀리서 널 보았을 때

다른 길로 갈까 생각했는데

변한듯한 널 보고 싶고

짧은 인사할까 하는 마음에


두근대는 가슴으로 한 걸음씩 갈 때

네 어깨 손 올리는 다른 어떤 사람

화가 난 네 얼굴은 미소로 바뀌고

두 사람은 내 옆을 지나갔지



지금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90년대 음악에 향수를 느끼는 이유는 (그 시대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딘지 모르게 비장하고 웅장한 요즘의 음악과 달리 당시의 대중가요는 정말 캐주얼하다.


화자는 멀리서 '널' 마주친다. 다른 길로 돌아갈까 생각한 걸 보니 '마주치기 껄끄러운 사이'의 사람인가 보다. 하지만 변한 듯한 네 모습을 확인해 보고 싶고 혹시나 반갑게 맞이해준다면 짧은 인사라도 건넬까 하는 마음에 너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간다.


저 멀리서 내가 다가오는 것을 너는 한눈에 알아챘는지 얼굴에는 화가 가득 담겨있다. 바로 그때, 네 어깨의 손을 올리는 '다른 어떤 사람'이 등장한다. 너는 금세 미소를 짓는다. 그러곤 그 사람과 함께 내 옆을 지나간다.




나는 병신, 그녀는 정상


[Hook]


둘이 되어버린 날 잊은 것 같은 너의 모습에

하나일 때보다 난 외롭고 허전해

네가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그래서 넌 둘이 될 수 있었던 거야



사랑을 '반쪽'으로 표현하는 가사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보통은 찢어지는 마음을 표현하는 하나의 클리셰로만 사용된다. 여기서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은 두 가지 차별점을 가진다.


우선 리듬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본 곡은 레게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쉽게 '슬플 수 없는' 리듬이다. 비슷한 작법을 활용한 곡이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인데 두 곡 다 명곡의 반열에 올라섰다. 필자가 늘 강조하는 이야기지만 '슬픔'은 슬프지 않게 표현했을 때 더욱 극대화된다.


둘째로 '이분의 일'의 모호함이다. 본 곡은 특이하게도 '반쪽'을 표현하는 데 있어 조금 더 수학적이다. 그러니까 '그냥 우리는 이제 남남'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고차원적인 표현이 첨가됐다는 뜻이다. 첫 가사인 '둘이 되어버린 날'이 가장 모호하다. 해석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데도 국민적인 후렴구의 탓인지 잘 언급되지 않는 부분이다.


'둘이 되어버린 날'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화자(날) : '둘이 되어버린 날'은 '너'와 내가 연인 되면서 완성된 '복수(2)의 의미'

2. day(날) : 화자와 '너'가 연인이 된 해당 '날짜를 의미'


1번 의미를 따라간다면 '화자' 개인을 잊은 '너'의 모습을 뜻하고 2번의 의미를 따라간다면 '우리의 첫 순간'을 잊은 '너'의 모습을 뜻한다. 둘은 확연하게 다르다. 전자의 뜻을 따른다면 지극히 직관적인 표현이 되지만 후자의 뜻을 따른다면 포용력이 넓은 보편적인 표현이 된다.


어쨌든 '우리'를 잊은 너의 모습에 화자는 '하나일 때보다' 외롭고 허전하다. 여기에는 고차원적 표현이 들어있다. '둘'이 됨을 잊은 '너' 때문에 '나'는 '하나'일 때보다 외롭다. 중간값 하나를 의도적으로 빠트린 표현이다. 바로 단어 자체로 '반쪽'을 설명할 수 있는 '1/2'의 존재다.


'네가 가져간 반쪽' 때문에 너는 '둘'이 될 수 있었고 나는 '일과 이분의 일'이 되었다. 조금 더 생각이 필요한 라인이다. 자, 한 번 생각해보자. 서로의 행복을 반으로 뚝 떼 가질 수 없으니 그들은 반쪽으로 떨어지는 것에 합의했다. 하지만 오롯이 '1'로서 남아있어야 할 그들에게 '미련, 그리움, 외로움'이라는 반쪽이 여전히 붙어있다. 그래서 그들은 '일과 이분의 일'이 됐다. 하지만 '너'는 지금 '2'가 됐다. 어떻게? 반쪽짜리 사랑을 만났기 때문이다.


곰곰이 돌이켜 볼만하다. 그녀의 손에 어깨를 올린 '어떤 사람'도 분명 온전한 '1'일 텐데. 그렇다면 그녀는 '2'가 아닌 '이와 이분의 일'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어쩌면 곡 속의 화자는 그 남자를 '반쪽짜리(별로인)' 남자라고 은근슬쩍 폄하하는 건 아닐까? 한 가지 더 가정할 수 있겠다. 이는 앞서 말한 두 가지 해석 방법과 그 결을 같이한다. 만약 '어떤 사람'은 1로 존재한다면 그녀 또한 '일과 이분의 일'이 아닌 1로서 그를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에게는 아직 반쪽짜리 감정이 남아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남아있지 않음'을 해석할 수 있다.




반쪽을 떼어낸다


[Bridge]


지금 너에겐 변명처럼 들리겠지

널 보낸 후 항상 난 혼자였는데



본 곡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성 보컬의 브릿지 부분이다. '너'의 입장을 대변했을 확률이 높은 프로덕션이다. 이 가사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화자와 그녀 사이에 감정이 남은 사람은 화자뿐이란 것을.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화자를 보내고 난 후 그녀는 항상 '혼자'였다. 오롯이 '1'로써 존재하던 그녀를 '2'로 완성시킨 사람은 애석하게도 '다른 어떤 사람'이다. 반쪽짜리인 줄 알았던 어떤 사람은(화자가 생각하기에) 사실 완벽한 '2'를 만들기 위해 그녀 앞에 나타난 또 다른 오롯한 '1'인 것이다. 그래서 슬프게 느껴진다. 이별 후의 감정은 때때로 너무나 이기적이고 일방적이다. 나는 불완전한 '일과 이분의 일'이 되었는데. 너는 완전한 '2'가 되었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비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