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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l 08. 2020

<만화영화 (Cartoon)>

만찢남녀


#0 만화영화



스마트폰 하나면 양질의 웹툰을 무한정으로 즐길 수 있는 요즘 세대들과 달리 내 초등학교 시절의 만화는 '만화영화'를 뜻했다. 투니버스는 초딩들의 고정 채널이었고 나 또한 정말 많은 만화영화를 봤다. 특히 <달빛천사>를 좋아했는데 작품의 주인공인 '루나'가 부른 OST 격의 음악들이 근래에 와서 여러 행사나 콘서트를 통해 열렬히 소비되는 문화 형태를 보니 비단 나만의 특수한 경험은 아니었나 보다. 레트로 바람은 만화 계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그 무대들을 보며 향수를 느꼈다.


만화영화의 뼈대인 '만화'는 필연적으로 과장스럽다. 개별 컷의 모음으로 스토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영상 매체들이야 서사나 맥락을 일일이 설명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무궁무진해 굳이 의식하게 되진 않지만 만화는 다르다. 표현의 범위가 컷에 갇힌 만화는 꽤나 제한적이다. 컷과 컷 사이에는 독자들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충분하고 그래서 작가는 작품의 의도를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때로는 과장된 표현을 통해 그 여백을 메운다.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동이 비현실적인 이유는 재미를 차치하더라도 서사를 잡기 위한 노력의 일종인 것이다. 어쩌면 만화는 텍스트와 비디오 중간 어디쯤에 존재하는 미디어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야기하는 만화는 우리가 흔히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는 장르가 아닌 'cartoon'과 'comics'를 뜻한다.


지코는 가사를 잘 쓴다. 아티스트 본인도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인터뷰를 여럿 봐왔다.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로 지코는 '어디서 들어본 듯한 콘셉추얼한 유행어나 일상어, 관용어'를 어떻게 대중음악에 차용해야 청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아티스트다. 그가 제작한 <Okey Dokey>에 등장하는 'R=VD'나  <Tough Cookie>에 지속적으로 차용된 'Tough Cookie'가 좋은 예다. 그는 대중들이 현재 어떤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빠르게 캐치하는 트렌드세터다.


물론 그도 한 때는 '펀치라인' (더 정확히는 '워드 플레이')이라고 부르는 표현법을 지나치게 남용해 곡의 흐름이나 분위기를 방해하곤 했다. 그러나 그 점은 당시 '말장난'이 한국 힙합이라는 카테고리 속 유행의 한 갈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다지 큰 흠이라고 볼 수도 없다. 어쨌든 지금의 지코는 완성형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라섰고 본인의 강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어필한 음악들인 <아무노래>와 <Summer Hate>를 연타석으로 히트시키며 다시 한번 대중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가사를 잘 쓰는 건 여전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nnq7_E_Tzlw




#1 첫 만남


[Intro]


Who are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현실감이 없어 널 보면 얼떨떨해

이 장면 마치 만화영화



곡의 초반부터 제목의 의미를 표현한다. 그녀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를 보는 화자는 만화영화 같은 장면에 얼떨떨함을 느낀다.



[Verse 1]


Oh my 여태껏 이런 캐릭터는 처음 봐

내 세계관은 벌써 엉망

대사 한 줄 없는 등장 씬에

압도돼 버렸어

너랑 마주칠 때마다 어디에서

멜로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와

천진난만한 얼굴이 딱 봐도

자기 비중을 모르는 눈치야

입맛만 다시지

아무 말 대잔치

계속 버, 버퍼링 걸린 듯이 버벅대



화자는 그녀를 '캐릭'라고 묘사한다. 곡의 제목이 가진 분위기를 적절히 따라가는 단어 선택이다. 지코는 그가 선보인 이전의 몇몇 작품들처럼 이번에도 '콘셉트에 충실한 음악'을 보여준다. 캐릭터로 표현된 그녀의 '대사 한 줄 없는 등장' 때문에 화자의 세계관은 벌써부터 엉망진창이 된다.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어디선가 멜로 음악이 BGM으로 깔린다. 그 배경음악을 타고 등장한 천진난만한 얼굴의 그녀는 일반적인 만화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주인공 등장 씬과 유사하다.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비중을 전혀 모르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화자는 입맛만 다시고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인다. 버퍼링 걸린 것처럼 버벅대며 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코는 첫 벌스부터 콘셉트에 충실하다. '캐릭터, 세계관, 대사, 등장 씬, 멜로한 배경음악' 등은 만화영화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소스들인 동시에 청자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범위'의 단어들이다. 한때 사운드클라우드에 상주하던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이 가사가 아닌 곡의 분위기나 커버 아트로만 만화를 차용했을 때, 그것은 '서브컬처'의 일종으로만 분류되었다.


그러나 지코는 같은 선상에 있는 토픽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굳이 만화로 비유하자면 사운드클라우드의 래퍼들이 일반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마이너 한 만화를 표방한다면 지코는 누구나 알 만한 만화가 가진 대중적인 성향을 본 곡에 담아냈다. 학창 시절 미술을 전공했다는 그는 분명 이것보다 더 넓고 전문적인 묘사를 진행할 수 있음에도 캐주얼한 단어 배열을 통해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적정선을 지켜낸다. 대중음악 프로듀서이자 가창자로서 이보다 더 귀중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을까.




#2 답답한 전개


[Hook]


Like 너튜뷰

순식간에 Million view

동그래진 눈에 소용돌이 뱅뱅 도네

이 장면 마치 만화영화



인트로를 반복한 프리 훅 이후의 훅이다. 마치 '너튜뷰'처럼 순식간에 100만 조회수를 뽑아내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이다. 그녀를 보는 화자는 이전에는 '얼떨떨'했다면 지금은 눈에서 '소용돌이'가 뱅뱅 돈다. 이 또한 보편적인 범위 내에서 쉽게 상상이 가능한 '만화적 과'이다. 화자가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는 상황(물리적이든 비 물리적이든)을 적절하게 표현했다.


유튜브를 '너튜뷰'라고 바꿔 부르면서 유연하게 방송 심의를 통과하는 동시에 다음 라인과 유사한 음운을 의도적으로 배치하면서 청각적인 쾌감 또한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 소소하지만 섬세한 구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Verse 2]

쓸데없는 네 잔 동작에도

들썩여 지구 전체

너가 상상이 만든 가상 인물이면

난 반박 불가 천재

전에 알던 변덕쟁이가 아니지

난 누군가의 엄연한 매니아

동심을 찾을 수 있어 Any time

1회 분량은 자그마치 스물네 시간

스쳐 지나갈 때마다

화들짝 놀라 잠깐 동안 모든 게 슬로우 모션

가뜩이나 낯가림 심한 내게

인싸 코스프레는 어려워

뻘쭘해 괜히

끊기네 맥이

아무 진전없는 둘 사이의 Story



앞선 첫 번째 벌스와 유사하게 콘셉트를 지속한다. 그녀의 '쓸데없는 잔 동작'에도 지구는 들썩인다. 이 또한 만화적 과장이다. 재밌는 건 바로 다음 라인이다. 이 라인의 의미가 모호하다. '네가 상상이 만든 가상의 인물이면'이라는 가정이 붙기 때문이다. 


이전의 라인까지는 단순히 만화적 요소를 차용하면서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면 뜬금없이 이 가사를 통해 '전지적 작가'의 시선이 개입된다. 하나의 인위적인 연애물을 지켜보듯 상상하게 만들던 음악의 몰입감이 한순간 깨져버리는 것이다. 이 또한 만화로 비유하자면 이야기 전개 도중 작가의 개인적인 코멘트가 불쑥 등장하는 격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표현의 '확장'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본 곡도 하나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이 곡 안에서 '그녀'를 만들어 낸 사람은 다름 아닌 '지코'다. 그런 그녀를 만들어 낸 사람이 '나'라면 나는 반박 불가의 천재란 말은 그러므로 '그녀'를 수식하는 최상위 미사여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코의 표면적인 시그니처 사운드가 '지아코'라면 이 곡에서는 보다 톡톡 튀고 독특한 방식으로 자기만의 시그니처를 곡 자체에 새겨놓은 참신한 라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시 곡 속으로 돌아온다. 화자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변덕쟁이였다. 순간순간 마음에 드는 대상에게 푹 빠진 '잡덕'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고선 그렇지 않다. 이제 그는 엄연한 누군가의 매니아다. 당연히 '그녀'의 매니아다. 만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덕후'를 한 사람만을 위한 '매니아'로 표현했다.


만화영화 같은 그녀만 있다면 화자는 언제나 동심을 찾을 수 있다. 물론 1회 분량은 자그마치 하루나 되는 긴 러닝 타임이지만 말이다. 그녀가 내 옆을 지나가면 잠시 동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뜩이나 낯가림이 심한 화자는 우리 주변의 '인싸'들처럼 행동하지 못하고 '버퍼링 걸린 아무 말 대잔치'를 반복한다. 대화의 맥을 끊어버린다. 화자와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3 엔딩


[Outro]


짤막한 리뷰를 남긴다는 게 그만

노래 한 곡을 만들어 버렸네 뚝딱

I’m curious about your feedback

Too late, too late 시간 끌지 말고

완결을 내줘 Continue


인터미션 없이 시즌 2

시나리오를 함께 써보는 게 어떨까 해

엔딩은 마치 화양연화



아웃트로의 가사를 통해 소심하지만 귀여운 고백을 그린다. 그녀라는 '만화영화'를 관람하고 난 뒤 짤막한 리뷰를 남긴다는 게 노래 한 곡으로 탄생했다. '인싸 코스프레'에 익숙하지 못한 화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나 보다. 그녀의 피드백이 궁금하다. 화자는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완결을 내달라고 말한다.


Continue. 화자의 대답 혹은 그녀의 대답일 수도 있겠다. 만화영화가 끝나고 등장하는 'to be continue'처럼 이 '작품'도 완결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쉬는 시간(인터미션) 없이 바로 시즌2를 시작하자. 시즌1이 나만의 시나리오였다면 이번에는 공동 각본으로 작품을 기획하자. 그리고 언젠가 엔딩을 맺게 된다면 그 장면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화양연화)으로 그려내자.


'완결, continue, 인터미션, 시즌2, 시나리오, 엔딩, 화양연화'는 앞선 벌스와 훅에서 등장한 여러 단어들처럼 콘셉트에 충실하다. 그러나 단어가 주는 임팩트는 더 크다. 특히 '인터미션'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으로 '쉴 틈 없이 애정을 키워나가자'를 어필하는 동시에 Continue와 인터미션 사이에 몇 초간의 의도적인 공백을 두면서 잠시 동안 긴장의 끈을 풀었다 다시 조이는 프로덕션적 '감정의 이완'이 일품이다. 


엔딩을 묘사한 '화양연화'는 지금까지 화자가 집약해놓은 모든 감정을 덤덤하지만 최대치의 풋풋함으로 풀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단어가 아니었나 싶다. 이 '만화영화'의 끝은 '화양연화'라니. 라이밍마저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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