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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l 13. 2020

지정연애제

우리는 비자발적 연인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유전의 강력한 힘을 믿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DNA의 족쇄에 묶여 쉽게 바꿀 수 없는 어떤 선천적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 편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언제나 타고난 편법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것이다. 차은우의 외모, 유재하의 음악성, 김계란의 신체 능력과 황예지의 사랑스러움만 봐도 알 수 있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압도적인 재능의 영역이란 우리가 인정하기 싫을 뿐, 꽤 선명한 가시성을 띤 채 우리 주변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그러니 사랑 또한 그런 재능의 레이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카페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은밀한 관찰을 담은 사랑고백을 하루에도 여러 번 수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소개팅을 나가도 MSAD인 사람이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외적 재능으로 뭇 남성/여성의 사랑을 모조리 섭렵하는 카사노바가 있는가 하면 끝끝내 소위 말하는 '마법사'가 된 못생긴 MSAD 또한 존재한다. 여기서 MSAD란 '모솔아다'란 저열한 단어에 내 멋대로 간접적인 명칭을 붙인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MSAD들은 아마도 자의와 상관없이 그들의 경쟁자였던 알파 메일, 알파 피메일들 때문에 본인 아니게 MSAD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흠모하던 그 혹은 그녀들은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대체할만한 자들이 차고 넘쳤을 것이다. 반면 MSAD들은 아마도, '진정한 사랑이란 타고난 자질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숭고한 것'이라는 본인만의 얄팍한 신조와 함께 그런 '진짜' 사랑이 언젠가 반드시 나타나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 굳게 믿으며 지금껏 미련하게도 모양만 다른 모순에 함몰됐을 확률이 높다.




어느새 멋대로 명칭을 붙이는 나의 행동과 비슷하게 사람들은 무례하게도, 일정 시기 이후에도 '떼지'못한 사람들을 곧 번식 경쟁에서 조기 탈락한 패배자로 낙인찍기 시작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동정은 언제나 성스러운 동시에 촌스러운 것이었으나 이 영역에 있어 '나이'라는 요소만큼은 어째서인지 이 시대에 유독 더 비중 있는 판단의 척도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미디어는 젊은 활기를 가진 생동성 있는 사랑 이야기를 끊임없이 찍어내며 더 황홀한 성생활의 가능성 또한 지속적으로 시사한다. 어느덧 '섹스'로 대표되는, 사랑에 있어 몇 번의 경험이란, 반짝반짝 빛나는 립글로스처럼 우리의 입술에 부착되어 개개인의 매력의 증거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아닌 척 하지만 우리는 은근히 내 연인만큼은 요부이기를, 테크니션이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사랑은 그래서 곪아가기 시작했다. 너무나 자유분방해서, 너무나 쉬워져서 사랑은 가벼워졌다. 가벼운 게 뭐가 나쁘냐는 안일함과 그만큼 안일한 만남을 경계하는 사람들을 '씹선비'라고 대상화시키는 신종 성관념이 아이러니하게도 가벼워야 할 관계는 무겁게, 무거워야 할 관계는 가볍게 만들어 버렸다. 아마도 '사랑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가 결여와 척을 지는 입장인 것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하게 받는 사랑에는 결여가 없으니 사랑을 시작하고 전개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더한 노력과 궁리가 없어졌다. 우리는 사랑을 잘하라고 말하면서 환심을 사는 법, 잘 화해하는 법 따위를 매뉴얼로 배운다. 그러나 정작 '어떻게 사랑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질 않는다. 사랑을 받는 자는 사랑에 대하여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만큼 사랑은 일회성이 짙고 일방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게 되어버렸다.




그러니 나는 지금부터 '지정연애제'의 도입을 제안하는 바이다. 재능도 정해져 있고 사랑 또한 정해져 있는데 심지어 그것이 선악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일 수 있다면, 연애의 대상 또한 지정할 수 있지 않을까. 태초부터 맞지 않았던 사람들이 단순히 타고난 재능의 매혹적인 부분만을 부각해 지금의 옆사람을 꼬셔냈기 때문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는 연인의 형태가 끝내는 지속적인 데이트 폭력과 가스 라이팅, 리벤지 포르노로 인해 와장창 박살 나기도 하는 작금의 불안전한 연애환경 속에서 비교적 안전하고 확실한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진정으로 나와 꼭 맞는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감별해내 국가나 제도적 차원에서의 지목으로 가장 합리적인 연인을 지정할 수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사랑의 양적, 질적 공리주의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완성형에 가까운 연애 시스템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허황된 제안의 방법론부터 시작해 앞으로 일어날 수 있을 수많은 부작용들에 물음표를 띄우기 전, 우선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만약 이로 지정된 사랑 또한 지금의 연애와 같은 강렬한 희로애락을 여전하게 느낄 수 있다면, 우리가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나 프로그램에 의해 지정된 연애 프로세스를 따르는 시스템의 연인이 되더라도 설렘과 행복, 불쾌함과 화를 발판으로 발전하는 관계를 통해 얻는 성장을 완벽하게 보장받을 수 있다면 나는 이 지정연애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선택권 없는 '사랑의 허무주의자'가 아닌 최대한 안전하고 알맞은 짝을 확정적으로 찾을 수 있는 '비자발적 연인'이 되는 것에 우리는 명확하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자유연애'라는 단어는 커다란 부분집합처럼 느껴진다. 비교적 '단 둘'로 한정되는 '연애'라는 명사에 비해 무한한 가능성의 이미지를 가진 '자유'라는 명사가 접두어로 붙어서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처럼 선명하지 않은 단어들로만 '우리'를 정의한 것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유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우리'를 쉽게 파괴하려 든다. 끊임없이 우리를 고치려 든다. 새로운 사랑의 재개발을 빌미로 기존에 지어진 우리의 건축물들을 허가 없이 붕괴시키려 든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에게 그럴 권리는 없다. 심지어 임의와 우연으로 지정된 우리의 연인들에게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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