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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l 21. 2020

소중함에 속아 익숙함을 잃지 말자

변해야 한다면

'변했다'는 말은 연인 관계에서 특히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말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그러니 변했다고 말하는 당신조차도 이미 변했을 가능성다. 둘째, '부정적인 변함'은 대개 이기적인 판단에서 비롯된다. 당신의 배우자가 변했다고 실망하는 것은 당신의 편향된 상상에서 시작됐을 뿐이다. 충분한 대화 없이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일반적으로 젊은 여성들이 소셜 미디어 등지에서 연애 초기와 다르게 '변한' 남자 친구들에게 일침을 가하거나 투정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는 경향이 보인다. 나는 이 문장을 곱씹다 보면 이유모를 불쾌감을 느낀다. 내가 남성이기 때문에 이 말 자체에 반사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하다고 정의되지만 나는 그 어떤 여성들보다도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기에 이 문장이 역으로 불편하다. 이유가 뭘까.




보통 연인 관계는 남자의 '작용'으로 시작된다. 내가 박보검이나 남주혁 정도의 미남이 아닌 이상 여성의 '작용'을 기대하긴 힘들다. 당연하게도 남성들은 우선적으로 '잘 보이기 위해' 변장한다. 문을 잡아주고 무엇을 먹고 싶은지를 물으며 집까지 바래다준다. 실제로 본인이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는 수컷이라면 당연하게 내재된 자연적 본능이다. 아마 대부분의 소개팅 자리에서 남성들은 이 메커니즘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라고? 너무 부럽다!


여성들은 이 변장한 남성의 '작용'에 속아 넘어간다. 짐짓 속은 척을 해주기도 한다. 위장된 첫인상은 그렇게 한 쌍의 연인을 탄생하게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변장은 희미해져 간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모습으로 회귀한 그는 이제 문을 잡아주지 않고 무엇을 먹고 싶은지를 묻지 않으며 집까지 바래다주지 않는다. 이 변화에 여성들은 화가 난다. 이러한 '익숙함'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반작용'은 나를 '소중하게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변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연애 초기보다 더 오래 통화하지 않아서? 나를 만나러 오는 자리에 슬리퍼를 신고 나와서? 아니다. '시그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익숙한 사랑에는 은유가 힘을 쓰지 못한다. 이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재밌는 지점이 많은 부분이다. 연애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작용/반작용'이 커다란 낙차 폭을 가지며 어긋나는 사례들을 되짚어보면 특히 잘 알 수 있다.


흔히 "나는 좋아한다는 신호를 나름 많이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걔는 내가 고백하니까 당황하더라. 자기를 좋아하는 줄 몰랐대."로 압축될 수 있는 사례들이다. 이는 '작용'의 주체인 남성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경우다. 이상할 정도로 여성들은 썸의 단계에서 만큼은 남성들의 시그널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그저 모른 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성들의 사회 안에서 흔히 '여자어'라고 불리는 특정한 맥락이나 '여우'들을 파악하는 데 타고난 능력을 갖춘 것 치고는 말이다.


반면 남성들은 이별의 시그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또한 "우리가 최근에 많이 다투긴 했지만 다 풀고 잘 지내기로 했거든? 근데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더라. 어이가 없었지. 갑자기 왜?"로 압축될 수 있는 사례들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 남성들이 이별의 시그널을 잘 포착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병렬적'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남성들의 경우 한 가지 다툼이 마무리되고 나면 웬만해선 그 상황을 기억에서 지운다. 그러니 'A, B, C'가 개별의 사건으로 종결된다. 반면 여성들의 대부분은 'A+B+C'로 다툼의 잔여분들을 축적한다.


이 감정들이 모이고 모여 폭발하게 되면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더라'가 이루어진다. 여성들은 A와 B와 C가 쌓이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이별의 시그널을 보냈지만 이를 병렬적인 이벤트로 말끔하게 지워버린 남성들은 그저 '잘 풀었으니까 됐다'라며 시그널을 수신하려는 노력 조차 하지 않는다. 더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그래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려는 남성들과 시간이 지날수록 소중해지려는 여성들. 둘 중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걸까.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남성으로서 내가 이 문장에 이유모를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내 '익숙함'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기 때문인 것 같다. 분명 나 또한 연애가 지속될수록 그녀들이 편해졌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곧장 '그녀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귀결되는 것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그녀들이 익숙해질수록 연애의 새로운 면면을 맞닥트릴 수 있었고 그 안에서 어떤 감정보다 생생한 사랑의 민낯을 마주하며 농익는 애정을 만끽했다. 나를 비롯한 남성들이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하다. 당신의 '소중함'만이 가장 숭고한 가치는 아니다.


그러니 나는 반대로 말하고 싶다. 소중함에 속아 익숙함을 잃지 말자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당신을 향해 팔을 크게 휘저으며 반기는 모습을, 당신을 한 번이라도 더 웃겨보겠다고 씨알도 먹히지 않는 아재 개그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모습을, 사랑의 권태기에 힘들어하는 당신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애를 쓰는 모습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고. 이 모든 사랑의 시그널은 우리의 '익숙함'에서 비롯되었으니까.


당신이 익숙하다 느끼는 어떤 감정과 행동에도 분명한 소중함이 깃들어있다. 나는 사랑이 99의 익숙함과 1의 소중함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 사이에서 무엇이 더 옳냐는 질문과 선택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확실한 편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익숙함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익숙함에서 오는 소중함은 있어도 소중함에서 오는 익숙함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중함이란 한정판의 감정은 익숙함이 있기에 더욱 빛이 난다. 소중함이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라면 익숙함은 그 보석을 세공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사람과 사랑은 변한다. 이왕 변한다면, 또 변해야 한다면 더욱 멋진 방향으로 변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소중함 보다는 익숙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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