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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Oct 24. 2020

여름과 가을, 그 사이의 바다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물론 겨울 바다의 황량함도 무시 못할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바다가 있는 동네에서 16년을 살았으니 이번만큼은 제 말을 믿으셔도 됩니다.


이번 여름은 아주 시원했습니다. 에어컨을 자주 틀어서가 아니라 체감상 이번 여름은 그다지 덥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 이유 중 하나는 이번 여름의 반절을 바다와 함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시 그거 아시나요? 바다가 익숙한 사람들은 여름에 해수욕을 즐기지 않습니다. 대신 눈으로 그 광경을 즐기지요. 해변의 비키니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포함되는 오브제이긴 하지만, 제가 말하는 광경은 바다와 백사장 그 자체입니다. 저는 이번 여름, 그 풍광의 대부분을 온전하게 즐기곤 했습니다. 하와이안 셔츠의 윗 단추 두 개를 풀고서, 금세 얼음이 녹아 줄줄 흐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서 말이지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바다의 이미지는 사실 섬과 더 가깝습니다. 사진으로나마 봐온 보라카이나 괌의 풍경 같은 이미지가 제 머릿속의 이상적인 바다입니다. 시간대는 어스름한 저녁이고요. 옥빛 바다의 물결을 느끼며 사랑하는 연인과 수중에서 서로의 몸을 감싸 안고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어떤 미상의 이미지가 저에겐 여름이라는 분위기를 정의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정말 큰돈을 벌게 된다면 아주 작은 무인도를 하나 사고 싶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언제든 그곳으로 달아나기 위해서 말이지요.


사실 바다는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어떻게 이름마저 이렇게 싱그러울까요. 바다라니. 아, 바다! 그에 반해 섬은 무언가 비밀스럽습니다. 그래서 아름답지만 외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랑 영화의 로케이션이 섬인 이유는 아마 그러한 설명하기 힘든 분위기 때문일 것입니다. 섬은 이름마저 아름답고 외롭습니다. 섬이라니. 아, 섬! 시옷과 어 미음이라니. 이렇게 외롭고 찬란할 수가.


정말 떠나고 싶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와이파이가 없고 데이터가 터지지 않는 곳에서. 더우면 물놀이를 하고 배고프면 밥을 지어먹다 늦은 밤엔 술 한잔 기울이며 모기향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느지막이 일어나도 하루는 길고 아주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한없이 만끽하며 당신과 끊임없이 나태해지고 싶었습니다. 가라앉고 싶었습니다.


아직 모든 더위가 채 달아나지 못한 9월의 비 오는 아침에 이 글을 씁니다. 이번 여름도 드넓은 바다에 고작 발만 담가보았네요. 섬에는 가보지도 못했군요. 제 스물일곱 번째 여름도 이렇게 지나갑니다. 그리 행복한 여름은 아니었지만, 가을은 좀 느리게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밤과 새벽이 찾아오면 이불을 꼼꼼히 덮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네요. 물론 더위를 많이 타는 저는 아직도 선풍기를 틀고 자긴 하지만요. 


언젠가 꼭 같은 곳을 바라볼 당신을 위해서. 이번 여름도, 내 상상 속의 최고의 섬으로 달아나는 탈출 계획을 잠시 미뤄둡니다. 아주 좋은 호텔에서의 호캉스나 절경을 가진 계곡에서의 피서도 좋지만, 언젠가 꼭 같이 달아납시다. 우리 둘 만의 섬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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