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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Aug 08. 2020

민트초코를 지지하는 사람들

민초단은 승리한다!

취향은 군집을 만든다. 또한 이러한 군집은 보통 상반성을 가진다. 제3과 제4, 회색의 진영도 분명하게 존재하나 무릇 군집이란 대비될 때 더욱 극명한 소속감을 가진다. 래퍼 화나의 곡 <Harmony>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와 너, 남과 여, 아이와 노인, 마음과 몸, 가까움과 멈, 시간과 공간, 땅과 공중, 달과 볕, 안과 겉, 다음과 전, 시작과 정지, 칭찬과 멸시, 참과 거짓, 앎과 모름, 잘 잘못, 감과 고, 다와 소, 악과 선, 아와 적, 반과 정, 암과 명, 야와 여, 짝과 홀, 탄과 멸, 만남과 결별, 차가움과 열'이 그러하다.




'민트초코' 논란이 거세다. 맛있다는 부류와 치약을 도대체 왜 먹냐는 부류로 곳곳에서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참고로 나는 민트초코 파. 즉, 민초단이다. 민트초코 맛 우유를 즐겨마시며 민트초코 아이스크림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민트초코를 혐오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미각에는 문제가 있다.


디시인사이드


사실 이러한 논란은 꽤 오랜 과거부터 존재해왔다. 내 기억에는 탕수육에 소스를 붓는 '부먹' 파와 소스를 붓지 않는 '찍먹' 파의 대립이 그 시초다. 본래 탕수육은 소스와 함께 볶아먹는 음식이기에 사전적 정의만 따르자면 탕수육을 올바르게 먹는 방법은 '부먹'이 맞다. 하지만 이 논란이 생겨난 이유는 한국 특유의 배달음식 문화 때문이다. 지금이야 배달이 매우 빠른 속도로 우리의 현관 앞으로 도착하는 시대지만 과거에는 1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경우 또한 비일비재했다. 소스를 부은 채 오랜 시간 방치하면 눅눅해지는 탕수육은 이를 피하고자 '분리'를 선택했다. 이를 처음으로 고안해 낸 중국집 사장님은 지금의 이러한 문화 현상을 예측했을까? 그렇게 우리는 부먹과 찍먹을 두고 끝없는 내란에 돌입했다.


비교적 다수의 의견을 표방하는 찍먹 파의 입장이다. 우선 찍먹은 탕수육의 식감을 존중한다. 소스를 붓지 않아 바삭함을 유지한 탕수육 본연의 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에 합당하다. 둘째로 찍먹은 비교적 청결한 느낌이다. '양념갈비는 싸구려 고기의 맛을 감추기 위해 양념을 범벅한 것이다'는 근거 없는 도시괴담처럼 소스에 버무려진 탕수육은 왠지 모르게 불청결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찍먹 파는 본인들 스스로를 '원활한 인간관계를 가진 지성인'이라고 주장한다. 찍먹 파의 대다수가 부먹 파에 분노하는 이유는 탕수육 소스를 붓는 행위 자체가 상대방의 취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미개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MBN, <나는 자연인이다>


다음은 부먹 파의 입장이다. 나름대로 논리적인 찍먹 파에 비해 이들은 좀 더 직관적이다. 우선 그들은 탕수육의 '기원'과 '맛집'을 통해 근거를 나열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본래 탕수육은 소스를 볶아 먹는 음식임으로 부먹을 부정하는 것은 근본을 거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뿌리를 중요시 여기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먹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본인을 상것이라고 어필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요 견해다. 또한, 맛집으로 유명한 중국집의 대부분은 직접 방문해보면 소스가 부어져 나온 탕수육을 대접한다는 점을 예시로 들며 '탕수육을 맛있게 먹는 방법은 부먹'이라는 논지에 못을 박는다.


취향을 기반으로 한 이러한 논쟁에는 당연하게도 정답이 없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다수파의 일방적인 탄압으로 대화가 종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탕수육 논란'에서는 찍먹 파가 그 우세함을 가져갔다. 일상의 곳곳에서 소심하게나마 부먹을 제안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경멸의 눈빛을 보내며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 먹는다.


하지만 이 '부먹/찍먹' 논란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일정 수준 합의에 도달했다. '계산한 놈이 결정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통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직접 방문한 가게에서는 부먹, 배달시켜먹는 가게에서는 찍먹'이 보편화된 것이다. 아예 짬짜면 그릇에 따로 옮겨 담아 부먹과 찍먹을 동시에 실현시키는 현상도 생겨났으며 이를 적절히 융합한 사례 또한 탄생했다. 바로 '깔먹'이다. 이는 소스를 접시에 붓고 탕수육을 그 위로 쌓는 형태의 플레이팅을 말한다. 또 누군가는 부먹, 찍먹과 상관없이 탕수육은 어떻게 먹어도 맛있으니 그냥 '처먹'을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인스티즈, <부먹 찍먹 논란을 종식시킬 그릇의 등장>
페이스북, <순하리>
JTBC, <냉장고를 부탁해>




몇 가지 바리에이션이 생겨났다. 하와이안 피자, 솔의 눈, 홍어, 계피, 데자와, 고수, 오이와 같은 강력한 호불호를 가진 음식들이다. 이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음식은 '하와이안 피자'와 '오이'다.


하와이안 피자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전 세계적인 논란을 가진 특이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하와이안 피자는 '하와이'라는 명칭이 붙어 미국 음식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1962년 캐나다에서 처음 시작한 음식이다. 특이한 점은 피자에 일반적으로 올라가는 육류 토핑들과 달리 '파인애플'이 들어간다는 것인데 이 파인애플과 치즈의 조합이 크나큰 호불호를 만들어냈다. 아마도 치즈의 느끼함을 중화시키기 위해 이 달콤한 과일을 추가한 발상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지만 특히나 서구권에서는 앞서 말한 한국의 부먹, 찍먹 논란만큼이나 커다란 분쟁을 만들고 있다. 대표적으로 피자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의 경우 이 하와이안 피자에 대한 엄청난 혐오감을 표출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AhXR62wnmPQ

BODA, <이탈리아인들을 고문하는 방법? 한국 파인애플 피자를 처음 먹어본 이태리 사람들 반응>


다음으로 오이의 경우는 하와이안 피자와 달리 매우 협소한 범위성을 가졌다. 페이스북이란 인터넷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유행하게 된 한국만의 밈(meme)이기 때문이다. 얼핏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한국의 식문화에서 오이는 쉽사리 뺄 수 없는 위치에 존재하는 '식재료'이기 때문이다.


이 논란은 페이스북의 한 페이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시작됐다. 2017년에 개설된 이 페이지는 불과 사흘 만에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페이스북 페이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오이 논란'이 유독 큰 지지를 받은 이유는 주요 페이스북 이용자인 젊은 세대의 '항변'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음식은 가리지 않고 먹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을 지겹도록 들으며 자랐다.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본인만의 취향을 거부당한 것이다. 어떤 이는 체질적인 문제로 또, 어떤 이는 단순한 선호도의 차이로 오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구조가 만든 고정관념 때문에 이를 억지로 강요당해왔다. 짜장면이나 냉면, 김밥에 추가된 오이를 먹지 않는 편식에 면박을 주면서 취향이라는 '개인성'을 말살시킨 것이다. 비단 오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문득 DJ DOC의 노래 <DOC와 춤을...>의 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을 먹나요. 잘못해도 서툴러도 밥 잘 먹어요.


그렇게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가 만든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새로운 군집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실제로 오이를 싫어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2020년 현재, 우리는 '민트초코' 논란에 휩싸여있다. 이는 이전의 탕수육 논란보다 더욱 첨예한 갈등을 만들고 있다. 비교적 강약의 관계가 명확해 보였던 부먹/찍먹에 비해 민트초코는 그 기세가 제법 팽팽하다.


재밌는 점은 유독 한국에서만 이 민트초코에 대한 호불호가 격렬하다는 것이다. 식문화에서 그 이유를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육식 위주의 식문화를 가진 서구권은 식사 후 남은 진한 맛을 지워줄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그 재료로 청량한 민트가 주로 사용되었다. 깨끗하지 않은 물을 순화하기 위해 끓여 마시는 차 문화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민트는 서구권에서 차를 우려내는 용도로 자주 사용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경우 고깃집에 구비되어 있는 박하사탕 그릇이나 녹차 티백을 생각해보면 이 '입가심'이란 그리 이질적이진 않은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결국 '민트'가 한국의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일뿐이다. 그저 서구권의 식문화가 비교적 최근에 정착했기 때문에 생기는 해프닝인 것이다.


또 하나 재밌는 점은 이 '민초단'이라는 군집은 새로운 문화현상을 만들어냈다. 근래에 유행하게 된 'MBTI 심리검사'처럼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또 다른 수단이 된 것이다. 비슷한 MBTI를 가지는 사람들끼리 묘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처럼 민트초코는 일종의 '소속감'을 만들어냈다.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유명인과 싫어하는 유명인을 자세하게 구분 짓는 현상이 이를 방증한다. 참고로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유명인에는 아이유, 백종원, 다현, 버락 오바마 등이 있으며 싫어하는 유명인에는 RM, 전효성, 모모, 페이커 등이 있다.


유튜브, <이지금  [IU Official]>
V LIVE


민트초코 논란이 유행처럼 불거지면서 민트초코를 좋아하는지 아닌지가 하나의 사상검증 과정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이를 음해하는 세력 또한 생겨났다. 겉으로는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척 하지만 실상은 민초단을 무너뜨리기 위한 화전양면전술을 펼치는 사람들. 내부의 적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은 민트초코의 명성에 잠시 편승하려는 장사꾼과 의도가 뻔히 보이는 협잡배에 불과하다. 진정한 민초단이라면 이러한 괴식(?)에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민트초코는 반드시 차가워야 한다.


호식이, <민트초코 치킨>


사보텐, <민트초코 카츠>


맥도날드, <스피어 민트 빅맥>


나는 민트초코를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하와이안 피자는 엄청나게 싫어하며 홍어와 데자와, 솔의 눈과 고수는 선호하는 편이다. 계피와 오이는 그저 그렇다. 이처럼 '호불호'란 나름의 일정한 기준이 있는 단어 그 자체의 의미와 달리 때때로 무작위적이다. 쉽게 겹치지 않는 유전 코드로 이루어진 사람은 당연하게도 식성마저 각자 다른 개인성을 내포하고 있다. 정답은 없다.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니까.


그러나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민트초코의 매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생 전체의 기쁨 총량 중 절반은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민트초코가 주는 달콤함 뒤의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소주의 맛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을 알지 못한다'라는 진리와 일맥상통하다. 참고로 말하자면 민트초코가 치약 맛인 게 아니라 치약에 민트 맛이 날 뿐이다.


민초단은 승리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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