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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Aug 13. 2020

선택을 떠넘기는 사람들

'아무거나'라는 메뉴는 없습니다. (사실 있습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시작 단계가 가장 힘들었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일이 힘든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은 오히려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과정에서 겪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나는 구직을 희망하는 업체에 전화를 걸며 기다리는 몇 초 혹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어색한 몸짓으로 면접을 보는 몇십 분의 상황 따위에 지레 겁을 먹었다는 뜻이다. 종종 친구들에게 푸념하곤 했다. "그냥 누가 나한테 이거 하라고 일을 던져 줬으면 좋겠어. 정말 잘할 자신 있는데. 내가 먼저 찾아다니는 건 너무 어려워."


그렇다. 나는 시작을 힘겨워했다. 여덟 시간 동안 공부하는 것보다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알콩달콩한 연애를 지속하는 것보다 짜릿한 썸의 도화선에 불을 지피는 것이, 해병대 병영생활을 체험하는 것보다 병무청에 입대 지원서를 접수하는 것이 나를 힘들게 했다. 일종의 완벽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을 바엔 건드리지도 않는다. 다들 알다시피 현실에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피곤한 성격이다. 그렇게 이 극단적인 성격 때문에 '선택'을 강조하는 시작은 내게 커다란 콤플렉스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쉽게 선택할 수 있어 좋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미리 차단하겠다. 선택이 명확한 사람이라고 해서 '선택하는 순간'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선택을 최대한 피하고자 노력한다.




현시대 사람들은 선택을 남에게 미룬다. 나는 그 이유가 더욱 협소해지는 개인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언뜻 보기에 선택권을 넘기는 행위 자체는 배려심이 넘쳐 보인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선택권을 '떠'넘기는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상대를 배려하기 위함이라 말하지만 실은 내면의 은근한 '주도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주도면밀한 밑밥을 까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메뉴 선택권'이다. 이는 직장 야유회나 동아리 뒤풀이와 같은 단체 회식 자리에서는 딱히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선택권이 없는 경우가 많을뿐더러 삼겹살이나 치킨과 같이 호불호가 덜한 음식 하나로 통일되거나 가장 리더 격에 위치한 사람의 취향으로 메뉴가 선별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인 대 개인, 소수의 집단에서 메뉴 선택을 고민할 때이다.


우선 개인 대 개인이다. 앞서 말한 '주도권 경쟁'은 이 집단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인데 보통은 '선택권을 떠넘기는 자(A)'와 '선택권을 강요받은 자(B)'로 나뉜다. 메뉴 협의 과정에서 이 A와 B는 수시로 변경되기도 하는데 때때로 극단적인 A 둘이 나타나기도 한다. 반면 B 둘로 편성된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A의 '아무거나'가 발단이 된다. A와 B가 구분되지 않는 일반적인 메뉴 협의 과정을 가정해보자. 남성인 '찬우'와 여성인 '예지'가 있다. 아직까진 A도 B도 아닌 찬우가 묻는다. "오늘 뭐 먹을래?" 예지가 답한다. "아무거나!" 이 순간 찬우는 B가 되고 예지는 A가 된다. 비교적 '배려'라고 느낄 수 있는 찬우의 질문이 A가 되기 위한 선점의 행위였다면 예지는 단 한 마디로 이를 단숨에 역전시켜 버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무거나'는 상당히 폭력적인 대응이다. 가스 라이팅의 일종이라고도 느껴진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에펨코리아, <아무거나 충 참교육.jpg>


가장 문제인 점은 이 '아무거나'가 실제론 아무거나가 아닌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이다. 찬우는 아무거나를 제시 한다. "오늘 날씨도 험악한데 돼지국밥 어때?" 예지는 답한다. "돼지국밥은 별로 안 땡기는데..." 1차 아무거나의 실패다. 찬우는 이어간다. "그럼 막걸리에 파전 어때?" 예지는 답한다. "뭔가 밥이 될 거 같지는 않은데..." 2차 아무거나의 실패다. 찬우는 분개해하며 소리친다. "그럼 네가 골라!!!!!!" 예지는 답한다. "김치찌개 어때?" 다시 A와 B가 교대된다. 이렇게 몇 번 더 엎치락뒤치락하고 나면 어느 정도 틀이 잡힌다. '국물 있는 음식' 정도로 말이다. 더 세부적인 메뉴를 고르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이것을 '결정장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소수의 집단으로 상황이 확장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3인의 집단,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이 딱히 없는 경우에는 위의 '찬우/예지 과정'이 개인 대 개인보다 더 길게 지속된다. 이들은 각자의 희망 메뉴를 희미하게 던지며 끝없는 도돌이표를 그린다. 3인 모두가 우유부단하다면 메뉴 선택을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명확하게 먹고 싶은 메뉴가 한 사람이라도 있거나 표가 나뉠 정도로 팽팽하게 선호도가 갈리는 음식이 주요 안건으로 논의된다면 홀수라는 특성상 다수결을 따를 수 있어 빠르게 결정이 나는 경우도 제법 있다.


4인의 집단은 3인의 집단에 비해 합의가 더욱 어렵다. 입이 하나 더 늘었기 때문에 찬우/예지 과정은 3인에 비해 더욱더 길게 지속된다. 3인 집단과 다르게 짝수이기 때문에 과반수가 쉽게 형성되지 않아 합의가 어렵기도 하다. A와 B가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성별이 한 명이라도 포함된 그룹이라면 그 가짓수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래서 4인 집단의 메뉴 선택권은 보통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최상위 포식자가 가져가거나 중국집, 분식집과 같은 비교적 다양한 음식을 판매하는 곳을 차선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드물게 2인, 2인이나 1인, 3인으로 찢어져 먹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 '선택권을 떠넘기는' 행위는 디지털 환경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들과 네고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은근한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인터넷 거래 사이트'가 그랬다. 중고나라, 당근마켓과 같은 플랫폼을 필두로 '세상에 이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할 정도의 별의별 사람들이 목격되었다. 비슷한 형태의 온라인 시장을 구축하고 있는 인터넷 게임에서도 유사한 사례들이 속출했다.


'선(先)제시'는 이들이 온라인 거래 환경에서 주로 사용하는 전략이었다. 보통 현실세계의 현물 거래는 경매가 아닌 이상 판매가가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선제시는 판매가를 의도적으로 비공개하면서 교묘하게 시세를 속인다. 이는 구매자와 판매자를 가릴 것 없이 골고루 보이는 현상인데 그 본질 또한 결국은 주도권 경쟁에 있다. 각자의 이득을 위해 간잽이처럼 서로를 찔러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선제시는 판매자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매매법이다. 애초에 판매가를 비공개했기 때문에 구매자가 선제시한 가격이 판매자 본인이 원하는 마음속의 최소 금액보다 높지 않다면 거래를 중단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선제시는 매매 과정에서 조금의 손해도 용납하지 않는 판매자가 영리하게 이득을 취할 수 있는 필승법에 가깝다.


츄잉, <어떤 소설의 팩트 제시>


앞서 말했듯이 이 선제시 문화는 주도권 경쟁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얄팍함이 깔려있다. 가격을 비공개로 책정한다는 뜻은 (실은 그만한 값어치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 물건만큼은 '다르다'라고 과대 포장하는 것이다. 시세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덤터기를 씌워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기대심리도 섞여 있다.


판매자의 압도적인 승리가 용이한 선제시를 막기 위해선 상식적으로 이를 금지하고 명확한 가격 책정을 요구하는 게 맞다. 하지만 구매자들은 시스템을 바꾸기보단 역이용하기 시작했다. 선제시를 역으로 받아치는 '역(逆)선제시'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메뉴 선택권'에 등장한 A와 B가 수시로 변하는 상황처럼 매매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티키타카를 만들었다. 거래에 있어 흥정은 당연한 순리지만 가격을 제시하는 것을 두고 실랑이를 벌인다는 게 참 웃기지 않은가. 때때로 나는 이 사람들이 정말로 물건을 팔고 싶은 건지, 사고 싶은 건지 궁금할 때가 있다.


개드립




선택권을 떠넘기는 행동은 배려를 가장한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내가 메뉴를 골라서, 비싼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서 누군가에게 밉보이고 싶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싶고, 더 좋은 가격으로 물건을 팔고 싶어서 선택권을 떠넘긴다. 내 요구사항을 구태여 드러내 욕을 먹긴 싫지만 이득은 보고 싶은, 지극히 자본주의적 사고 회로 안에서 사람들은 자의적인 선택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수서양단의 이들을 위한 몇 가지 해결책이 등장했다. 우선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는 '아무거나'를 충족시키는 자판기와 메뉴판이 등장했다. 이들은 아무거나 버튼을 누르면, 아무거나 메뉴를 주문하면 무작위의 음료와 음식을 제공한다. 선택에 있어 극단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또, 그러한 고생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혹할 만하다.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호기심에 시도해보려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


OP.GG talk,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당신을 위한 자판기>
inOZ.com.au
아시아경제


메뉴 선택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주는 빙고판과 오늘 입을 옷에 알맞은 색 조합을 추천하는 코디네이팅 색상표도 등장했다. 이제 우리는 비교적 세분화된 분류 체계 안에서 선택을 덜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비 오는 날, 칼칼한 음식을 먹고 싶다면 빙고판을 따라 메뉴를 선택하면 되고 맑은 날, 연청색 바지에 딱 어울리는 상의를 찾고 싶다면 색상표를 따라 코디를 결정하면 된다.


후니넷


네이버 블로그


비슷한 측면에서 선택을 종용하는 분위기 자체를 봉쇄하는 아이템들도 생겨났다. '키오스크'와 '사이렌 오더', 옷 가게에서 말을 걸지 않는 '침묵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설치형 주문 단말 기계인 '키오스크'와 모바일 주문 시스템인 '사이렌 오더'는 과거 주문을 위해 길게 늘어진 줄을 없애는데 큰 일조를 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선택에 있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이 느끼는 눈치와 그 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의 분노를 감소시켰다. 현시대의 우리는 선택에 있어 충분한 시간을 보장받는 것은 물론 은연중에 선택을 강요당하는 '면대면'의 상황을 건너뛸 수 있게 되었다.


tPay, <키오스크>
스타벅스, <사이렌 오더>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냥 구경만 하려는데 지척의 거리로 다가와 끊임없이 말을 거는 점원들. 물론 본사의 매뉴얼대로 행동하는 것이겠지만 그 관조 자체는 우리를 너무나도 불편하게 만든다. "제발 좀 꺼져!"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후다닥 매장을 벗어나며 투덜댄다. "말 좀 안 걸면 안 되나?"


일본의 한 의류 매장에서는 매장에 구비된 파란 가방을 고객이 들고 있다면 단 한 마디의 말도 걸지 않는 '침묵 서비스'를 제공한다. 승객에게 말을 걸지 않는 택시도 등장했다. 국내에는 이니스프리가 매장 입구에 '혼자 볼게요', '도움이 필요해요' 태그가 걸린 가방을 두며 이와 유사한 무언의 서비스를 선보였다. 실제로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의 비대면 서비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5.9%가 점원이 말을 거는 곳보다 혼자 조용히 쇼핑할 수 있는 곳을 더 선호한다고 응답했다. 이커머스 시장이 활성화된 것에도 아마 비슷한 연유가 있을 것이다. 선택을 종용하는 것에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는 사람들.


이니스프리
채널A




선택을 두려워하는 현상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지금의 사회에서는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연결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슬픈 시대상이다. 끝없이 시도하며 깨지고 다시 도전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행복이 아닌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는' 기성품을 통해서 얻는 행복만을 좇고 있으니 말이다. 선택을 떠넘긴다는 것은 '무색무취'와 비슷한 거리에 있는 말인데도.


선택을 주저하며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아무거나' 버튼을 누르는 사람들에게는 일시적인 만족만이 있다. 뭘 마셔야 될지를 나 스스로도 모르는데 자판기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버튼을 누른다. 탄산음료를 먹고 싶진 않았지만 자판기는 코카콜라를 내뱉는다. 그제야 아무거나 버튼 옆의 이온음료 버튼이 보인다. 나는 이온음료가 더 먹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선택을 두려워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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