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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Aug 16. 2020

꼰대가 된 사람들

누구나 꼰대가 된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기피하고픈 호칭은 무엇일까. 정치적 색깔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빨갱이'나 '수구꼴통'과 같은 편향적 호칭일 것이며 직업적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기레기'나 '짭새'와 같은 비하의 호칭일 것이다. 하나같이 부정적인 뉘앙스가 가득한 낱말들이다. 이 부정의 꼬리표는 실제로 그런 사람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사고마저 편협하게 만든다. 특히 이 모든 부정의 호칭을 완벽하게 포괄하는 마법의 단어가 선행사로 붙을 경우 더더욱 그렇다.


바로 '꼰대'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많은 꼰대들을 만나왔으며 앞으로는 더 많은 개체수의 꼰대를 만나야 할 것이다. 꼰대는 어느 날 문득 우리를 찾아오는 재난문자와 같은 존재들이다. 무서워서 피하는 똥이 아닌 더러워서 피하는 똥들. 그렇다면 꼰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사회 통념? 후천적 경험?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자연발생?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꼰대는 '지극히 주관적인' 남에 의해 만들어진다. 누구에게나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다. 물론 그 이유를 굳이 찾으려면이야 수천 개가 넘는 단점들을 줄줄이 읊을 수는 있겠다만 사람 싫어하는 데 뭐 그리 귀찮은 잣대를 들이대겠는가. 싫은 건 그냥 싫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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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힘을 발휘하는 단어가 바로 '꼰대'다. 수천수만 가지의 이유를 단 하나로 축약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꽤나 은유적이며 파괴력이 강한 이 말은 그렇게 사회 구성원의 대략 절반 정도를 꼰대로 만들었다. 그러니 감히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과연 꼰대가 아닐까? 정말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꼰대가 된다. 결국 그놈의 '주관' 때문이다. 내 입장에선 개호로 쌍놈인 저 자식도 결국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 딸이자 좋은 친구이며 사랑하는 연인이기 때문이다.




사실 꼰대란 주관 대 주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확률이 높은 사람들을 뜻하기도 한다. 꼰대는 보통 확연한 서열관계 안에서 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학교 선후배, 사제 지간, 군대 선임과 후임,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부모 자식과 같은 '갑과 을'의 관계.


이들은 대개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다. 사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우리와 같은 을들은 묵묵히 이를 견뎌낸다. 하지만 문제는 이 '주관'이 전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상식의 선에서 갑의 자기중심적 사고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면 이는 꼰대라기보다는 고지식하나 능력 있는 리더의 지표가 된다. 꼰대와 마찬가지로 귀찮고 짜증 나긴 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주관이 편향되거나 구닥다리 고정관념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이들의 자기중심적 주관은 '도덕적 우월성'에서 주로 드러난다. 도덕과 윤리란 사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다면 그리 객관적이기 힘들기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도덕적 주관은 마치 법의 체계처럼 우리 위를 군림하려 든다. 선민의식에 잠식된 꼰대들은 아주 쉽게 남의 도덕성을 재단한다. 외모나 복장과 같은 물리적인 측면은 물론 취미생활이나 사생활 같은 비물리적 측면에도 거침없이 개입한다. 더욱 문제인 것은 이 도덕적 재단의 잣대가 본인에게는 유독 관대하다는 것이다. 강약약강의 사람들.


약치기그림


이들 갑은 대체로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다. 그보다 어린 세대이자 사회적 약자의 축에 속하는 을들은 때때로 소심한 반항을 전하지만 이는 곧 "나 때는 말이야" 앞에서 무력해진다. 예절과 예의를 강조하는 그들은 우리의 첫 만남을 잊었나 보다. 부장님, 저 처음 보자마자 바로 말 까셨는데요. 그렇게 꼰대는 중장년층에서 주로 발견되는 것처럼 보였다. 꼰대란 단어 자체는 젊고 개방적인 이십 대에게는 사뭇 어울리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젊은 세대는 과연 꼰대 청정 구역일까. 당연히 아니다. '강남좌파'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들리는 것처럼 '젊은 꼰대'들이 곳곳에서 태어났다.




우선 군대를 갓 전역한 젊은 청년들에게서 이 신종 꼰대 문화가 자주 관찰되었다. 남자는 '서열의 동물'이란 말이 마냥 틀린 건 아닌가 보다. 군번이 빠른 복학생들을 필두로 별 시답지 않은 대장놀이가 시작됐다. 21개월, 23개월, 24개월 혹은 그 보다 축소된 군 생활을 마친 이들은 저마다 수십 개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대장을 찾아 나섰다. 예비군 초년 차의 학생들은 이 대장을 중심으로 무리를 지어 다녔고 이에 대해 전혀 무지한 여성들은 종종 이들의 무의미한 허례허식을 두고 '군무새'라 희롱하기 시작했다.


XtvN, <최신유행프로그램>


이 '군기 문화'를 악용한 학과들이 몇 군데 있다. 체육과 관련된 학과, 예술 계통 학과, 간호학과가 그렇다.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은 '간호학과'다. 대체로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 학과는 군기가 강하기로 유명하다. 병역의무가 없는 여성들의 군기라니.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Newsnack


당연한 말이지만 이 또한 학습되었다. 나는 그 이유가 '경쟁'을 강조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IMF 이후 '범국민적인 노력'이 신성시되었고 무너진 가정을 일으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나타났다. 승패의 유무를 떠나 이들 모두는 무엇이든 경쟁할 것을 머릿속에 각인했고 이는 고스란히 그들의 자식 세대에게 전달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은 가야 한다"를 시작으로 점차 "좋은 대학을 가려면 외고나 특목고에 진학해야 한다"와 "그러기 위해선 선행학습을 해야 한다"로 발전했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결과를 얻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왜곡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의 Z세대는 경쟁에 익숙해졌다. 경쟁이라 함은 결국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상명하복의 관계를 만들어냈다. 그 누구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울 것 같은 이 세대도 그저 여가 시간을 활용해 다양한 문화생활을 영유할 뿐 20세기 초반의 사고방식과 크게 달라지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간호학과에서 이러한 점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여우'들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여성은 남성을 유인하기 위해 남성이 원하는 것을 어필한다. 예를 들면 가슴을 커 보이게 부풀리는 브라를 입는 것과 같은 '번식력 암시'다. 또한 한 실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은 다른 매력적인 여성의 성취와 능력을 견제, 비하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가 남녀관계에 얽히면 '여우'와 '여우 사냥꾼'이 등장한다. '남자들은 모르는 여자들의 여우짓' 따위의 가십 기사들을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사실 남성들은 이 '여우짓'에 큰 관심이 없지만(오히려 좋아하지만) 여성들은 유독 분개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ELLE


문제는 집단이다. 남성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간호학과에는 상식적으로 여우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재된 본능까진 거부하지 못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사람의 생명'과 직접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생기는 필요악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남성들의 군대문화에서 주로 보이는 변명(사격 훈련은 목숨과 직결되어 있으니 구타를 허용한다.)과 같은 궤의 '똥군기'일뿐이다. 과거 두발의 길이와 치마 수선의 유무로 학생들의 인품을 평가하던 꼰대 선생님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두발이 자유분방하다고, '똥꼬 치마'를 입는다고 해서 불량 학생이 되는 건 아닌 것처럼 그저 틀에 박힌 사회문화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나태함'에 불과하다. 불필요한 경쟁인 것이다. 굳이 간호학과에서 이 문제가 대두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핑곗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간호학과만의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성별이 한쪽으로 쏠리는 집단에서는 비슷한 형태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저 아니꼬울 뿐인 것이다. 나랑 사이가 나쁜 저 기집애가 풀메이크업으로 등교하는 게,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는 게 거슬리는 것이다. 그렇게 '선배'는 주관과 경쟁의식, 내재된 본능의 나쁜 점만 합쳐진 꼰대가 된다. 남성들이 단순한 힘의 논리로 상하관계를 확정한다면 여성들은 여기에 '감정의 논리'를 더한다. '여자어'와 '알 수 없는 여자들의 기싸움', '빠르게 상대의 차림새를 스캔하는 행동'은 여기서 시발한다.


SBS CNBC




타의로 인해 꼰대가 된 사람들도 있다. 이는 실제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는 '위치의 문제'로 꼰대가 된 이들이다. 대체로 이들은 '중간 관리자'들이다. 꼰대 짓을 하는 선배와 얄밉게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사이에서 갈등하던 이들은 자의와 다르게 꼰대가 된다.


현시대에는 80년대생 직장인들에게 주로 보이는 현상이다. '워라밸'이라는 이름으로 본인만의 편의를 위해 회식을 빠지고 휴가를 내며 정시 퇴근하는 90년대생과 다르게 이들은 앞서 말했던 IMF를 학창 시절에 겪은 세대들이기 때문에 90년대생의 합리주의적 사고관을 충분히 이해하는 동시에 부모 세대의 고통 또한 절실히 공감한다. 결국 이들은 90년대생 후배들에게 꼰대가 되지 않으려 하면서도 바로 윗 세대 선배들의 눈치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충고를 건넨다.


임홍택, <90년생이 온다>


문제는 이 80년대생은 위아래 모두에게 꼰대 취급을 당한다는 것이다. 불안정한 고용 시장과 개인주의 사고관의 확장으로 '평생직장'의 개념이 희미해진 90년대생은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순응하는 이들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역꼰대'와 같은 행동을 보인다. 반면 바로 윗 세대의 상사들은 "그나마 비슷한 세대인 너네들이 잘 규합해줘야지"라며 그 탓을 돌린다. 잔소리처럼 따라붙는 "요즘 애들은"은 보너스다.


'이념'으로 인해 꼰대가 된 사람들도 있다. 이는 어쩔 수 없었던 80년대생 중간 관리자의 고충과 비슷한 듯 다르다. 정치와 종교, 젠더 이슈가 대표적이다.


먼저 정치의 측면에서 현재 집권 여당인 '진보'와 야당인 '보수'의 대립이다. 여와 야는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보수 집단은 그 이름 때문인지 유독 꼰대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권력관계를 상정해보면 지금의 이념에서 꼰대에 가까운 집단은 오히려 진보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막연하게 보수 집단을 꼰대라고 생각한다. 현 정부 이전의 10년이 만든 고정관념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보수는 피도 눈물도 없는 기성세대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경제의 논리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쉽게 후려쳐 보수는 세금을 높이고 복지를 높인다. 진보는 세금을 낮추고 복지를 낮춘다. '세금을 높인다'는 전제조건은 '그 돈으로 복지를 높인다'는 결과를 가리는 '꼰대 이념'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애꿎은 젊은 보수 정치인들에게 이중 잣대를 들이미는 경우도 많다. 이들은 각자의 필요와 선호에 의해 선택한 이념 때문에 타의적인 꼰대가 된다.


페이스북,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다음으로 종교와 젠더의 측면은 각자 다른 층위로 대립한다. 종교를 뜯어보면 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이 개신교를 '기독교'라고 부르지만 사실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괄한 단어다. 이들에게 가장 자주 들이대는 잣대는 비종교인들이 바라보는 '사랑'이다. 한국에서 유독 '개독교'라고 비하당하는 개신교는 이 사랑을 설파하면서도 폐쇄적이다. '교회 오빠'들의 이중성을 저격하고 이 종교 집단을 하나의 답도 없는 '꼰대 집단'으로 지적하는 이유 또한 이 폐쇄성 때문이 크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라 부르는 가톨릭은 개신교에 비하면 유연하게 변화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아멘넷


젠더의 측면은 요즘 들어 더욱 첨예해지고 있다. 여혐과 남혐, LGBT가 뒤섞인 시대다. 이 집단들은 어느 하나 쉽사리 주도권을 내주지 않으며 서로를 '꼰대'라고 비난하고 있다. 여성을 향한 뿌리 깊은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이들은 기득권 남성들을 꼰대라고 부른다. 반대로 역차별을 겪는다고 주장하는 현시대의 젊은 남성들은 애꿎은 젊은 여성들을 꼰대라고 부른다. 성소수자의 의견을 대변하는 LGBT는 외로이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가며 이들 모두를 꼰대라고 부르지만 아직까지 이 의견은 무시당하기 일쑤다.


이 정치, 종교, 젠더 이슈가 한데 뒤섞이면 대체 누구를 꼰대로 봐야 할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도대체 '꼰대'란 무엇이길래 이리도 길길이 날뛰며 편을 가르는 것일까.




나는 꼰대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꼰대가 되기 때문이다. 나도 당신도 여러분도 모두 꼰대가 된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나만큼은 꼰대가 아닐 것이다'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진짜 꼰대는 자기가 꼰대인 걸 죽어도 모른다더니. 그런 사람만큼은 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처음처럼 X 그림왕양치기


오랜 기간 고착화된 문화를 일순간 변화시키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말은 쉽다. '어르신'을 '늙은이'나 '노친네', '개저씨'로 비하하는 것처럼 말이다. 꼰대들의 특징으로 자주 거론되는 '공감능력 부족'의 잣대를 우리에게 돌려보고 싶다. 과연 우리가 꼰대를 대하는 태도는 어땠는가. 내겐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실 김 부장님은 나와 친해지고 싶었기에 어색한 애정의 표현을 건넸을 수도 있다. 박 선생님은 정말 내가 잘 되길 바라 야자시간마다 내 구레나룻을 잡아당겼을 수도 있으며 최 소대장님은 소대의 결속력을 위해 총원 집합을 명령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이유로 나 또한 누군가의 '꼰대'가 되었을 것이다. 주관이란 가끔은 객관으로 착각할 만큼 단단한 밀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건 쉽게 깨거나 버릴 수도 없다. 그 자체로 내가 완성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명쾌하다. 나 스스로가 꼰대임을 인지하는 꼰대가 되는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는 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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