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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Aug 26. 2020

세줄 요약하는 사람들

네 인생도 가독성이 있습니까?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독후감 쓰는 것을 싫어했다. 독서를 싫어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 페이지의 반절을 뚝 잘라 줄거리와 느낀 점을 나눠 쓰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줄거리가 그랬다. 나에게 있어 독서란 완독 후 머릿속으로 그 여운을 곱씹는 것이지 그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중요치는 않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의 기억인데도 꽤 선명하다. 방학 숙제를 검사하던 선생님은 내 독후감에다 커다랗게 빨간 작대기를 그었다. 그녀는 내 독후감을 두고 '틀린 것'이라고 말했다. 맞춤법, 띄어쓰기, 글씨체의 교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틀린 것이라니.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 이유를 물었다. 선생님은 '책의 내용'과 '교훈'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한 페이지 빼곡히 어린 왕자의 스토리가 아닌 내 감정만을 담았던 것이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과정은 기술적으로도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200여 쪽의 분량을 가진 책을 단 다섯 줄로 요약하기에는 내 선천적 능력이 부족했으며 빼지 못할 인상 깊은 장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는 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였다. 나는 당차게 선생님에게 말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줄여요! 선생님은 가르쳐주기보단 다그쳤다. 다른 애들 다 잘만 하는 데 왜 너만 못해!


독후감은 말 그대로 '독서 후 감상문'인데. 왜 내 감상은 틀린 것이었을까.




현시대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어쩌면 이 글을 주의 깊게 탐독하고 있을지도 모를 여러분에게는 죄송한 일반화지만 여러분 또한 책을 읽지 않는다. 뉴 미디어 시대에 텍스트는 구시대 유물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궁금한 게 있다면 유튜브 어플의 아이콘을 누르지 책을 펼치진 않는다.


웹데일리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이 책을 읽는가. 바로 소심하고 외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활자가 주는 상상력을 매개로 현실에서 잠시간 도피한다. 자기 계발서나 전공서적을 읽는 사람들은 뭐냐고? 우리는 그것을 '읽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전시할 뿐이지. 책도 인테리어 소품이 되는 세상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모이는 독서 소모임에 참석해보면 이 경계가 명확하게 보인다. 나는 2년 간 여러 독서 소모임 활동을 했던 경험이 있다. 평균 8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 그 주에 공지한 책을 읽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내가 그곳에 만난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1. 논리적 지성파

이들은 도서 선정을 위한 투표 과정에서 소설과 시집을 극도로 기피하는 사람들이다. 보통 이들은 이과계열의 전공을 갖고 있거나 심히 세속에 찌들어 책을 '정보 습득'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독서 소모임에 출몰하는 이유는 더 많은 정보 습득과 인맥 형성을 위해서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아니라면 순수하게 '독서' 그 자체에 매력을 느낀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서를 배우기 위해서다.
2. 다짜고짜 감성파

이들은 1과 반대로 자기 계발서와 전문 서적을 극도로 기피하는 사람들이다. 보통 이들은 예체능계열의 전공을 갖고 있거나 사랑과 이별을 앞두고 있는 상황 때문에 책을 통한 감정의 '대리 만족'을 추구한다. 도서 선정 과정에서 큰 의견을 표출하진 않지만 선정 도서가 본인의 취향이 아니라면 불참에 과감하다. 책의 내용보다는 표지 디자인이 구매 욕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3. 엣헴 잡식파

이들은 1과 2를 적절히 합쳤다기보다는 전혀 별개의 존재들이다. 소모임의 장은 대개 이 유형이다. 보통 이들은 문과계열의 전공을 갖고 있으며 특히 인문과 어문 전공자가 많다. 아주 어릴 때부터 다독가인 케이스가 대부분이며 이들은 책을 편식하지 않기에 가장 많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화에서 이기려고 하기보단 경청하며 특정한 상황이 아니라면 중립의 태도를 지키고자 노력한다.


1, 2, 3은 모두 각자의 필요에 의해 책을 읽는 사람들이지만 한 가지 큰 공통점이 있다. 바로 '요약'하는 것이다. 이들은 개개인의 스타일대로 화법을 전개하면서도 듣는 상대방을 위해 요약한다. 특히 외적으로 두드러지는 부류는 1인데 이들은 마치 쉽게 비유하지 못하면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는 양 주된 논제를 하나의 단어로 정의해 청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듣도 보도 못한 전문용어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배움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을 선사하긴 하지만 의외로 쓸모 있는 지식 또한 쏠쏠하게 얻을 수 있다.


빙글, <중국-인도 관계 요약.jpg>


2의 경우, 국소적인 요약 능력을 보여준다. 이들은 새벽에 읽으면 전전전전전전전 여자 친구도 생각날 거 같은 감성 넘치는 에세이를 읽으며 책의 전체를 요약한다기보다는(보통 이들이 선호하는 책은 병렬적인 에피소드를 엮은 구성이 많다.) 꽂힌 구절을 기반으로 '본인의 경험을 요약'한다. 듣다 보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호소력이 강한데도 불구하고 이는 꽤나 정제된 요약에 가깝다. 거침없이 감정을 꺼내는 그들은 내 기준에서 놀랍기만 하다.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는 주제임에도 이들은 사람의 심리 상태를 비교적 정확하게 꿰뚫으며 생각보다 이성적이다. 이들의 요약은 파형이 진하게 남는다.


마지막으로 3은 기록의 용도로 요약한다. 앞서 말했듯이 단체의 장을 맡고 있는 경우가 많아 멤버들의 의견을 하나하나 종합하기에 바쁘다. 조용히 남의 이야기를 듣다가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 그를 축약하는데 누가 봐도 박수를 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 능력이 탁월하다. 뼈 있는 질문과 허를 찌르는 반론은 보통 이들에게서 나온다. 어쩌면 '요약 능력'이란 정말로 기술적인 영역일지도 모른다.




세줄 요약과 독서가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시대 사람들은 독서 부족 때문에 '세줄 요약'이 없으면 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오독과 난독은 별개의 문제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의 글을 주의 깊게 읽는 능력을 상실했다. 나는 이것이 '인간성의 퇴화'라고도 생각한다. 고작 책 하나 안 읽어서.


개드립, <실질 문맹의 원인>


인터넷 커뮤니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목격했을 만한 댓글 유형이 있다. 그래서? 세줄 요약 좀. 나는 '이틀'을 '2틀'이라고 쓰고 '왜 안돼'를 '외 않되'라고 쓰는 것 까지는 간신히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종류의 글이든 세줄 요약을 요구하는 이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살인 충동을 느낀다. 이들에게서 배려심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댓글 문화가 생겨난 시대 배경은 이해한다.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유행마저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대에 비교적 정확하고 빠르게 재밌는 콘텐츠를 골라내기 위해 내 눈이 머무르는 시간조차 아끼려는 요약의 발버둥을. 긴 호흡에 눈치를 주는 시대에 긴 글이란 '읽을 가치' 없이 전파와 데이터만을 낭비한다. 창작자의 노력과는 별개로, 글의 풍부한 내용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세줄 요약되지 않는 글을 더는 읽지 않는다.


시작은 TMT였다. 지금은 TMI라는 변형어를 더 많이 쓴다. 유명 메이저리거 박찬호 선수가 강단에만 서면 수다스러워진다는 몇몇 목격담들을 희화화해 만든 'Too Much Talker(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의 축약어다. 뜨악하다. 세줄 요약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놀림거리가 된다니. 어린 시절 TV를 보는 내게 "맨날 바보상자나 들여다본다"라고 말한 아버지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채널A, <취향저격 선데이>


곧바로 TMI와 설명충이 나타났다. 이는 더욱 악질적인 단어들이다. TMT가 '발화자 자체'를 공격했다면 TMI와 설명충은 '메시지' 또한 곧이곧대로 들이받았다. 'Too Much Information(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말하는 사람들)'과 '설명'이라는 설득의 필수요소를 제시하는 사람들을 벌레(蟲)라고 비하하는 것이다.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라는 변명이 붙을 뿐 이는 대체로 비호감의 발언을 입에 담은 사람들의 의견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시해도 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매우 무례하고 위험한 단어다.




반면 나는 비슷하지만 다른 형식으로 사용되는 몇몇 유행어와 신조어들은 굉장히 좋아한다. 그것은 누군가를 비하하는 용도로 쓰이지 않으며 오히려 단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준다. 대표적으로 '실화냐?'라는 유행어와 '웃프다'라는 신조어가 그렇다.


인터넷 방송인 '보겸'의 말버릇이 그 유래라고 추정되는 '실화냐?'는 매우 센세이셔널한 유행어다. 일반적으로 구어(口語)로 거의 쓰이지 않은 사어(死語)에 가까운 단어 중 하나인 '실화'를 함축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분명 이 낱말이 유행되기 전의 우리는 사실 여부를 묻는 것에 그리 큰 리액션을 보이지 않았다. '진짜?'는 일상에서 쉽게 휘발됐고 맞장구로 연결되는 경우 또한 그리 많지 않았다. 이는 단어의 어감도 한 몫했다. 하지만 대개 착 달라붙는 어감으로 유행하게 되는 유행어들은 일반적으로 비하의 의미를 가득 담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실화냐?'는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적절한 공감을 유도할 수 있는 선한 유행어다.


MBC every1,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표면적으로는 웃기지만 실제로 처한 상황은 슬픈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인 '웃프다'는 구조적으로 특이하다. 긍정의 의미를 담은 '웃다'와 부정의 의미를 담은 '슬프다'를 합성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는 점점 더 경계가 모호해지는 사람들의 감정 상태를 더없이 훌륭하게 표현하는 단어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대'가 울음 이후의 멋쩍은 웃음을 두둔하는 말이라면 '웃프다'는 그 자체로 두 가지의 감정을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단 하나로 정의하기 힘든 감정을 이보다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잘생김과 예쁨을 동시에 갖춘 '잘생쁨'과 같은 단어 또한 이와 유사한 형태의 변형 신조어다. 이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정의하게 해 준다.


보배드림, <웃프다의 진수>




줄이고 줄이는 것에 익숙해진 세상이다. 재밌고, 확실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기에 말과 글을 줄이는 젊은 세대들과 하늘에 계신 세종대왕님이 천인공노하겠다며 이에 혀를 차는 기성세대들. '별다줄(별걸 다 줄인다.)'하는 사람들과 그러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균형을 맞춰야 할까.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앞으로도 나는 하나의 긴 말을, 긴 글을 줄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요청하는 것도 매우 무례하다고 느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지나치게 장황한 글을 쓰고, 말을 한다. 긴 호흡을 가진 사람들을 더 사랑하기도 한다. 고쳐보려고도 했지만 쉽지가 않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은 수다쟁이에게, 더 자세히 무언가를 설명하고픈 설명충에게 줄이는 것은 배출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문득 괘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필요에 의해 나를 찾아왔으면서 뭐?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라고? 에라이 퉤.


하지만 재밌는 유행어와 신조어는 앞으로도 매우 사랑할 것이다. 그 몇 개의 단어들이 몇십 줄의 글보다 내 마음과 상태를 더 잘 대변하니 말이다. 내 글은, 내 말은, 내 삶은 세줄 요약이 불가능하지만 이 속에 담긴 '무언가'는 분명 요약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그걸 '보편'이라고 부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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