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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Aug 27. 2020

외모를 보지 않는 사람들

쾌락주의 윤리, 그 뒤의 외모지상주의

대학 시절, 나는 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계통의 학문을 전공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학우들도 이성인 경우가 훨씬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대화의 주제는 보통 연애와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우리는 남자의 연애관과 여자의 연애관을 서로서로 공유하며 양질의 조언들을 맞교환했다.


그중 내게 가장 힘이 됐던 피드백은 '외모'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녀들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


"오빠, 여자들은 외모 별로 안 봐요."


연애 시장에서 큰 메리트가 없던, 특히나 외모에서는 딱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던 나는 그녀들의 말이 내심 고마웠다. 내 시장가치를 폄훼하지 않으면서도 일말의 기대감을 심어줬으니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녀들의 남자 친구들은 누가 봐도 잘생긴 사람들뿐이었던 것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뽑고 보니 스카이 출신'인 것일까. 몇 안 되는 남학우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역시 잘생긴 사람이 인품도 좋은 걸까.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평소 "저는 외모보다 마음씨를 더 봐요"라고 자주 말했던 두 해 후배 N이 그녀를 열렬히 짝사랑했던 H의 고백을 단칼에 거절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금이라도 공통분모가 존재하는 커뮤니티에서는 그들을 향한 추측이 난무했는데 N과 H, 모두와 친했던 나는 대놓고 그녀에게 물었다.


"너 근데 H랑 평소에도 엄청 친하지 않니? 다른 애들도 다 이미 너네 사귀는 줄 알고 있던데. 왜 그랬어?"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H 오빠, 다 좋거든요? 근데 외모가 취향이 아니에요."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여자는 외모를 본다는 것을. 비단 여자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모를 본다는 것을. 딱히 충격적인 결과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멋지고 예쁜 사람들은 사랑을 담뿍 받아왔다. 특히 지금과 같은 철저한 자기 관리 시대에 '부족한 외모'란 오히려 자기애가 결핍된 사람을 뜻하는 말처럼 쓰이기도 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같은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닐 테다.


그러나 문제는 '인정'에 있다. 대개 남성들은 여성을 볼 때 외모를 본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편이다. 더 나아가 매력적인 이성의 척도가 외모'만'일 정도로 이 쾌락 욕구가 무척이나 강하다. 길거리를 걷는 남자들 중 아무나 붙잡고 "얼굴은 정말 예쁜데 성격은 엄청 더러운 여자랑 얼굴은 별론데 성격은 나랑 완전 찰떡궁합인 사람, 둘 중에 누구를 만나시겠어요?"라고 물었을 때 후자를 고르는 사람은 0에 수렴할 것이다. 연애의 시작에 있어 외모가 전부인 것을 남성들은 그래도 인정하는 편인 것이다.


1boon - 카카오


반면 여성의 대부분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우선 '합리화'의 문제다. 남자 친구가 있는 여성들에 한정해서 이 케이스는 현재 본인의 기준에 조금은 못 미치는 남성을 만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말을 해서라도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처럼 보인다. 사람은 비교의 동물이기 때문에 친구의 잘생긴 남자 친구를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비난의 화살이 내 남자 친구를 향해 날아가는 것은 너무나 부당하므로 그가 아닌 '잣대'에게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외모지상주의를 당연시하는 사회가 잘못됐다고.


다음은 '타협'이다. 이들에게는 실제로 외모가 최우선 순위가 아닐 수도 있다. 재력이나 조건을 그보다 더 우선시 여기는 경우, '외모까지 완벽을 따지는 건 조금 아니지 않나?' 하는 내적 협의를 용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케이스에 더 현실적인 타협 이유는 '능력 부족'이다. 속되게 말해서 외모, 신체조건, 능력이 전부 갖춰진 남성이 내 차례까지 올 가능성은 현저히 낮기 때문에 타협하는 것이다.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감지덕지. 여기에 외모까지 바란다면 연애를 지속하거나 결혼에 도달하기 힘들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의 가치가 최상품이라고 여기지 않는 이상 보통 이와 같은 타협을 통해 외모를 차선으로 두는 것이다.


조선일보


마지막은 '기준'이다. 남성과 여성의 미적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외모를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남성은 여성의 외모를 1부터 10으로 극단적으로 수치화한다면 여성은 남성의 외모를 고작해야 1부터 3 정도로만 나눈다. 남성들은 대개 본인의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서슴없이 '너는 1, 못생겼다'라고 말하는 무례함을 보이는 데 비해 여성들은 여러 미적 기준을 통해 얼굴 자체로 평가하는 외모는 1이더라도 어깨의 넓이, 키, 엉덩이, 손가락, 콧대, 목소리 등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해 '너는 얼굴은 못생겼지만 키는 크니까 2, 괜찮네'라고 남성에 비하면 점수를 후하게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


철저하게 '얼빠'인 남성에 비해 여성은 마찬가지로 얼빠긴 하지만 아닌 척을 하는 것이다. 그 원인은 각자 다르지만 '외모를 안 본다'에는 그래도 본인만의 최저기준은 통과했다는 조건하에 다른 부분들이 충분히 매력적이라면 연애가 가능하다는 말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아무리 그래도 '평균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에펨코리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 철학의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 것'에 있다. 그를 추종하는 '에피쿠로스 학파'는 윤리에 있어 '쾌락주의'를 주장했다. 단어의 뜻을 오해하기 쉽지만 그의 쾌락은 방탕함과 환락을 뜻하는 게 아니라, 고통과 혼란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종의 평정(ataraxia)을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쾌락'이란 곧 '고통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다.


그 시작점에는 대중적인 의미의 쾌락과도 일정 부분 연관이 있었다. 쾌락주의와 비슷해 보이는 행복주의를 설파했던 키레네학파는 가능한 한 많은 쾌락을 취하는 데 행복이 있다고 말했다. 육체적이고 말초적인 자극에서 오는 즐거움을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바람직한 삶이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멀리하는 삶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순간적, 감각적 쾌락이란 시대를 막론하고 극도로 경계되는 부분이며 반박할 만한 역설의 요소 또한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에피쿠로스 학파는 이와 반대된 '절제된 삶'을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정원의 철학자'라고 불렸으나 동시에 '돼지의 철학'이라고 비난받았다.


tvN, <알쓸신잡3>


그렇다면 이들은 왜 직관적인 쾌락 너머의 소극적 쾌락주의와 아타락시아의 경지에 대해 말했을까. 쾌락은 당연하게도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선택했다가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혀 고통을 평정으로 넘기는 '정신적 쾌락의 단계'로 향하려고 한 것이다. 이들은 일시적인 쾌락이 아닌 지속적인 쾌락, 평정심을 통한 쾌락을 진정한 '쾌락(快樂)'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상은 이후 '근대 경험론'과 '공리주의'에 몇 가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한 '질적 공리주의'에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밀은 '쾌락의 양'이 전부라고 말한 제러미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를 반박하며 쾌락에도 높은 질(인간의 쾌락)과 낮은 질(동물의 쾌락)이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벤담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인정하면서도 그 유명한 말인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를 주장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인간의 쾌락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권기복, <동물은 도덕적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고자 노력한다. 인류가 동물과 구분되는 몇 안 되는 지표 중 하나가 바로 도덕성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정착한 이후로 사람은 본인의 자유를 마음껏 즐기되 다른 사람의 자유 또한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맹목적으로 옳다고 배우며 자라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 평등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평등이란 대개 너무나 주관적인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외모가 그렇다. 외모 또한 하나의 능력이자 가치 판단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공공연하게 쉬쉬하면서도 암암리에 인정한다. 그렇다면 '외모를 본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일까?


 



외모를 봄에 있어 도덕적인 결함이 분명하게 있으나 이를 애써 무시한 채 현시대에 유행처럼 쓰는 말이 있다. 바로 "관상은 과학이다"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이 매우 위험한 도덕성 결핍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 '외모를 봄' 행위는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가식보다 더한 '위선'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불과 몇 개월 전, 대한민국을 격노하게 만든 'N번방 사건'을 우리는 여전히 기억할 것이다. 나 또한 크게 분노했으며 그들에게는 화학적 거세가 당연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한 가지 도가 지나친 비난의 포인트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도덕성을, 인간성을, 잔인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닌 원초적인 '외모' 비하였다. 이는 뒤이어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정준영과 최근의 AOA 사태의 가해자로 지목되는 지민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인스티즈, <살면서 절대 피해야 할 관상>


소셜 미디어 여러 군데에서는 '관상은 과학'이라며 가해자들이 하나 같이 '못생겼음'과 '범죄자 상'이라는 인신공격을 정당화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죄가 있으니 못생겨 보이는 것이지 못생겨서 죄가 있는 건 아니다"와 "그렇다면 저 가해자들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남성들도 결국 같은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는 뜻의 조롱이냐"며 반박했지만 맥락을 파악하라는 수많은 협박이 이를 묵살시켰다.


네이트 판


나는 이 현상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그토록 주장하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력을, 집안을, 외모를 통해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비호감이라는 이유 때문에 누군가의 '외모'를 꼬집어 도덕성을 비난한다. 이 얼마나 폭력적인 행태인가. 만약 신인공분할 연쇄 살인마와 여러분이 꽤나 비슷하게 생겼다면, 어딜 가든 당신의 얼굴을 보며 그 살인마를 잠시나마 떠올린다면 어떻겠는가. 외모로 인품을 판단하지 않는 세상을 누구보다 바라게 되지 않을까?


분노를, 조롱을 위해 누군가의 '외모'를 공격하는 것만큼 쾌락적인 행동은 없다. 이 무분별한 공격은 잠시지만 큰 해방감마저 느껴지게 한다. 과거 대부분의 개그 프로그램에서 상대역의 외모를 비하하고 희화화한 것 또한 이와 같은 '쾌락'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쾌락을 얻기 위해선 이와 같은 현상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적으로 알 것이다. '잘생긴 남편은 3개월 가고 착한 남편은 3년 가지만 못생긴 남편은 하루도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하루살이의 삶을 살다가 죽는 것은 비단 '누군가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관상은 과학이라고? 여러분의 외모는 어떠한가. 거기에서도 과학이 느껴지는가?




다시 돌아가 내 대학 시절, 나는 N에게 다그쳤다.


"너 근데, H한테 맨날 술 취하면 데리러 오라고 하고 수업도 같이 듣고 그러잖아. 외모가 마음에 안 들면 애초에 여지도 안 줘야 되는 거 아니야? H는 일편단심 해바라기처럼 너만 보는데. 그게 어장 안에 가둬놓고 갖고 노는 게 아니면 뭐야. 그럼 이제부터 남남처럼 지내겠네?"


그녀는 다시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는 계속 싫다고 했어요. 근데 계속 좋다고 쫓아다니는 거 단호하게 쳐내기도 그렇잖아요?"


그때 문득 한 가지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N아 만약 너, 이렇게 H가 계속 달려들다가 갑자기 네 취향에 딱 맞는 존잘남이 나타나서 고백하면 어떡할 거야? 완전 박보검이랑 똑같이 생겼으면?"


그녀는 찡긋 윙크하며 상큼하게 답했다.


"오빠, 박보검이요? 그럼 당연히 콜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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