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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Sep 21. 2020

<시차>

파리의 시간


각자의 시간



시간은 공평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각자의 인생이 바뀐다는 말은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자랐다. 때때로 나는 나보다 한 발 앞서있는 사람들을 보며 큰 질투심을 느꼈고 내가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재능 부족'에 그 책임을 돌렸다. "나는 열심히 했지만 운이 안 좋았어. 나는 멍청해서 더 많은 시간을 학습해도 타고난 천재들을 따라잡을 수 없어. 그게 어떻게 내 탓이야. 나는 열심히 했는걸."


그렇게 나 같은 사람들은 불평만 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 사회는 경쟁에 익숙하기 때문에. 어쨌든 패자는 말이 없기 때문에. 조용히 분을 삭이며 패인을 분석하다가도 나는 이 '시간'이 정말 공평하냐는 질문에 섣불리 답을 내리지 못했다. 어느 면에서는 분명 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효율이라는 명목 하에 시간 대비 거의 동일한 노력을 투자한 게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한다. 한 번쯤은 겪어봤을 만한 모두의 이야기니까. 물론 성공한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어떤 방식으로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갔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느리지만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B를 봤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약진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면서도 뒤에선 그를 욕했다. "쟤는 멍청해. 뭐 하러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성과도 없잖아. 시간 낭비야." 나 또한 그들과 비슷하게 생각했다. 불평뿐인 나보다도 더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B에게는 확신 어린 눈빛이 있었다. 그리고 뻔한 성장 드라마의 이야기처럼 그는 우리 중 제법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단기간에 대단한 성공을 거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확실하게 본인만의 시간을 살아간 사람은 없었다. 언젠가 그의 우직함에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너는 애들이 그렇게 평가하는 거, 화 안나? 어떻게 그렇게 평온할 수 있어?" 그는 씩 웃으며 답했다. "애초에 걔네들을 신경 써본 적이 없어. 친구로서 관심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어쨌든 걔네는 걔네고 나는 나니까. 너무 뻔한 말이지만 신경 쓴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 나는 그냥 내 시간을 사는 거지."


그의 열정을 복사하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몇 번은 그러한 마음가짐을 차용했다. '조금 느리지만 나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 나도 할 수 있어. 이까짓 거 내가 못할게 뭐야?' 하지만 그와 같은 다짐은 채 며칠을 가지 못했다. 언젠가 '실패를 인정하고 빠르게 포기하는 것도 재능이다'라는 격언을 마주쳤고 나는 그 말이 더 진리에 가깝다고 느꼈다. 본인만의 시간을 살던 B와 다르게 대다수의 범인들은 '현실' 앞에 좌절했다. 도대체 무엇이 현실일까. 어쩌면 본인만의 시간을 살며 묵묵히 전진할 수 있는 능력도 일종의 재능이 아닐까. 그제야 나는 B 또한 천재라는 것을 체념하듯 인정하게 됐다.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노력의 천재였다.


그렇게 노오오오오력은 어딜 가든 내 발목을 잡았다. 학업도 연애도 직장도 어쨌든 노력해야 쟁취한다는 이 단순한 진리가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웠다. ADHD가 의심될 정도로 나는 한곳에 깊이 집중하지 못했고 언젠가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일을 만나게 된다면 주저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리라 상상했지만 그러한 일은 단 한 번도 내 눈 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나는 갈수록 나태해졌다. 그래서 나는 '각자의 시간'이란 이기적이지만 불공평한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나는 너무나 나이브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sHq6Q-7NsU




 학교 안의 음악


[Verse 1]


밤새 모니터에 튀긴 침이

마르기도 전에 강의실

아 참, 교수님이 문신 땜에 긴 팔 입고 오래

난 시작도 전에 눈을 감았지

날 한심하게 볼 게 뻔하니 이게 더 편해

내 새벽은 원래 일몰이 지나고

하늘이 까매진 후에야 해가 뜨네

내가 처량하다고 다 그래

"야 야, 난 쟤들이 돈 주고 가는

파리의 시간을 사는 중"이라 전해



곡 속의 화자는 강의실로 향한다. 이 곡을 듣는 청자들은 이러한 내러티브가 음악을 통해 전달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밤새 모니터에 튀긴 침'이 랩 연습임을 당연하게 인지한다. 저 빛나는 연예인처럼 느껴지는 우원재의 <시차>에는 그 또한 언젠가 우리 대부분과 비슷한 학생이었음을 암시한다. 좀 특이하긴 했겠다. 팔에 있는 문신 때문에 교수님이 긴 팔을 입고 오라고 한 것을 보면. 이 또한 기존 사회 질서에 일종의 저항정신을 보이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느껴진다.


화자는 강의실에 앉아 강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눈을 감는다. 본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뻔할 테니까. "쟤, 음악 하는 애라던데? 와, 저 문신 봐봐. 음악 하는 애들은 밤에 잠을 안 자나?" 하지만 그는 이러한 시선이 그리고 이러한 본인의 '시간'이 더 편하다.


그의 새벽은 원래 일몰이 지나고 하늘이 까매진 후에야 해가 뜬다.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찾아온 뒤에 해가 뜬다'는 모순적인 표현을 통해 그의 <시차>는 같은 시간을 살아도 나에게는 '밤이 낮이 된다'는 남들과의 차이를 말한다. 화자를 한심하게 보는 눈빛을 보낸 사람들은 또한 그를 처량하다고 말할 것이다. 화자는 여기에 답변한다. "야, 난 니들이 돈 주고 가는 프랑스 파리의 시간을 사는 중이야"


이 라인이 우리를 강하게 찌른다. 실제로 우원재가 본인의 어머니에게 자주 했던 변명이라고 한다. 정확히 7시간의 시차를 가지는 서울과 파리. 남들이 자는 시간에 나는 파리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표현이 일품이다. 동시에 한 가지 해석이 더 가능하다. '돈 주고(give) 가는 파리'라는 휴양의 느낌과 대비되는 '사다(buy)'의 의미를 통해 화자는 남들이 자는 밤에 만들어낸 성과로 언젠가 도달하게 될 '파리의 시간을 구입하는 중'임을 호소한다. 지금은 성공한 아티스트가 되어 전 세계 투어를 다니는 AOMG의 우원재를 떠올려보면 이는 '그 만의 시간'이 가져온 성과를 미리 예견했다고 볼 수 있다.



난 이게 궁금해

시계는 둥근데 날카로운 초침이

내 시간들을 아프게

모두가 바쁘게

뭐를 하든 경쟁하라 배웠으니

우린 우리의 시차로 도망칠 수밖에

이미 저 문밖에는 모두 그래

‘야, 일찍 일어나야 성공해, 안 그래?’

맞는 말이지 다

근데 니들이 꿈을 꾸던 그 시간에

나도 꿈을 꿨지

두 눈 똑바로 뜬 채로



강의실에서 눈을 감은 채로 화자는 궁금해한다. 나를 처량하게 생각하는 저 눈빛들과 나의 시계는 똑같이 둥근데 왜 날카로운 분침과 초침들은 내 시간을 아프게 찌를까. 둥근 시계와 대비되는 뾰족함을 가진 시곗바늘을 통해 무명 래퍼로써 그 시절을 효과적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부끄럽지만 필자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어 이 표현 앞에 이유모를 동요가 일어난다.


화자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뭐든 바쁘게, 경쟁하라고 가르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클리셰적인 표현이지만 이를 문신을 가리라고 권유하는 교수님의 강의실에서 눈을 감고 상상했다는 미장센을 미리 제시했기 때문에 차별화된다. 화자는 이러한 편견에서 벗어나 '우리의 시차'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눈을 감고 파리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아마 실제로 몸은 저 문밖을 나서진 않았겠지만, 상상 속의 그는 이미 파리로 떠난 상태인 것이다. '파리의 시간을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아침형 인간의 말이 다 맞다고 인정하지만 그는 본인의 시차를 변경하려 하지 않는다.


이 또한 틀에 박힌 표현이지만 그는 남들이 꿈을 꾸는 시간에 눈을 뜬 채 본인만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기차 안의 음악


[Verse 2]


4호선 문이 열릴 때,

취해 있는 사람들과 날 똑같이 보지마

그들이 휘청거릴 때마다

풍기는 술 냄새마저 부러웠지만

난 적응해야 했거든 이 시차,

꿈을 꾸게 해 준 침댄 이 기차

먼지 쌓일 틈이 없던 키보드 위,

그리고 2009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GRAY on the beat ya"



피처링으로 참여한 로꼬의 벌스다. 그는 본인만의 정체성을 놓지 않으면서도 이 곡의 주제의식을 정확하게 관통했다. 그가 쓴 가사 속의 화자는 4호선에서 출발한다. 이전의 벌스에서 우원재가 강의실을 통해 보여준 미장센과 비슷하게 그는 퇴근길을 상상하게 한다.


기차의 문이 열린다. 피곤에 찌든 화자가 들어선다. 하지만 비슷한 시간대에 기차에 탑승하고 있는 다른 승객들처럼 취한 상태는 아니다. 이는 아주 늦은 시간을 암시하는 가사처럼 느껴진다. 화자는 그만큼 늦게 퇴근하는 중인 것이다. 한 열차 안에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휘청거리는 사람과 화자의 공통점은 피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 그들이 유흥을 즐길 때, 화자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화자는 이러한 '시차'를 적응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 진짜 '꿈'을 이루게 해 줄 침대는 그의 또 다른 '기차'다. 마찬가지로 본 곡의 작곡가인 그레이와 2009년부터 함께 지금까지 달려왔기 때문에 키보드에는 먼지가 쌓일 틈이 없었고 아티스트로써 로꼬와 그레이, 모두 적응한 본인만의 시차에서 성공을 거머쥐었다.


재밌는 점은 로꼬가 기차의 모티브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인데. 이는 그의 아이덴티티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첫 EP, [Locomotive]는 앨범 커버부터 로꼬의 머릿속에서 빠져나가는 기차를 통해 그의 포부를 내비친다. 물론 그의 예명인 'loco'와 동력을 의미하는 'motive'의 뜻을 합치는 동시에 '기관사'라는 작위적인 네이밍을 붙인 것이 분명하지만 어쨌든 그는 과거, 기차를 통해 본인을 표현한 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로꼬는 본인의 아이덴티티를 적극 활용해 본인만의 시차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힙합의 작법이 줄 수 있는 '아는 사람만 아는' 음악적 쾌감과 세계관을 성공적으로 구축해냈다.



아침은 까맣고, 우리의 밤은 하얘

난 계속 칠하고 있고 똑같은 기차를 타네

걱정한 적 없어 막차 시간은 한 번도

얇았던 커튼이 햇빛을 완벽히 못 가려도

난 지금 눈을 감아야 해

내일의 나는 달라져야 해

우린 아무것도 없이 여길 올라왔고

넌 이 밤을 꼭 기억해야 돼



또한, 마찬가지로 [Locomotive] 이후에 발표한 그의 첫 정규 앨범, [BLEACHED]의 8번 트랙 <아침은 까맣고>의 가사를 깨알같이 차용해 이 세계관에 힘을 더한다. 화자의 아침은 까맣지만 밤은 하얗다. 이 하얀 밤을 끊임없이 칠하는 '우리'는 똑같은 기차를 타는 동료들이다. 그리고 화자는 한 번도 막차 시간을 걱정한 적이 없다. 애초에 막차를 타지 않을 테니까. 각자의 시차를 보내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할 그는 첫차를 탈 테니까. 그러니 앞서 문이 열린 4호선의 시간대를 늦은 밤이 아닌 이른 아침으로 재설정할 수 있다. 화자는 첫차를 타며 취객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화자는 눈을 감는다. 자고 일어난 그의 내일은 또다시 달라져야 할 것이고 그는 그렇게 아무것도 없던 시절처럼 여전히 달릴 것이다. 밤에. 그리고 이 음악을 듣고 있는, 같은 기차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으로 대변되는 청자들은 이들의 행보를, 밤을 꼭 기억해야 한다.




대기실 안의 음악


[Verse 3]


밤새 모니터에 튀긴 침이

마르기도 전에 대기실

아 참, 문신 땜에 긴 팔 입고 오래

녹화 전에 눈을 감고 생각하지

똑같은 행동, 다른 느낌

시차 부적응에 해당돼

지금 내 옆엔 'Loco' 그리고 'GRAY'

모두 비웃었던 동방의 소음이 어느새

전국을 울려대

"야, 이게 우리 시차의 결과고,

우린 아직 여기 산다 전해"



다시 우원재의 마지막 벌스. 이 벌스를 통해 덤덤하게 응축한 감정이 폭발한다. 첫 번째 벌스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진다. 하지만 장소는 변경된다. 강의실에서 대기실로. 본 곡이 우원재의 쇼미더머니 파이널 곡으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현실의 상황을 미루어보면 그는 학생에서 뮤지션으로 성공한 과정을 통해 무대의 끝을 장식하려고 했던 것 같다. 강의실에서 눈을 감은 것처럼 본인의 무대를 상상하며 그는 눈을 감고 생각한다.


학업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문신을 제약하는 교수님방송 심의를 해친다는 이유로 문신을 제약하는 제작진. 장소는 다르지만 똑같은 행동에 그는 다른 느낌을 받고 이를 곧 '시차 부적응'이라고 표현한다. 본인의 꿈 또한 막상 이뤄내고 보니 현실과 마찬가지로 제한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시차 적응을 위해 밤을 꼴딱 새우곤 한다. 곡 속의 화자는 물론 본 곡의 주인인 우원재, 그리고 그의 성공에 일조한 홍익대 동문 로꼬와 그레이까지. 모두가 비웃었던 동아리 방의 소음이 어느새 전국을 울려댄다. 그들은 외친다. "야, 이게 우리 시차의 결과고, 우린 아직 여기 산다 전해!" 


막상 우원재는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결승 무대에서 이 곡을 라이브로 불렀다면 역대급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아쉬워한다. 그의 비약적인 성장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우원재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성장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따뜻한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의 시간



이 곡을 듣다 보면 눈물이 찔끔 난다. 대학 시절, 나 또한 음악이 좋아 친구들과 밤을 새 가며 음악을 만들곤 했기 때문이다. 나도 이 기분을 적확하게 안다. 물론 지금의 나는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중이지만.


나는 시차가 없는 일본을 제외하면 '외국'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친구들의 유럽 여행 소식을 전해 듣다 보면 나 또한 그곳의 시간을 상상하게 된다. 날짜 변경선을 넘어 우리의 밤을 사는 그들의 낮을 말이다. 뻔한 말이지만 나의 밤은 누군가의 낮임을, 나의 낮은 누군가의 밤임을 그제야 알게 된다.


나는 여전히 내 시간에 불평하며 산다. 큰 성공을 거두고 파리의 휴양을 즐기는 사람들을 질투하지만 이 또한 결국 같은 답변으로 귀결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남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 이 글을 마무리하며, 어차피 또 수백 번의 좌절을 견뎌내야 하겠지만 나는 내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나와 여러분의 '시차'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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