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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Oct 01. 2020

빠른 년생인 사람들

족보 브레이커, 이들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인가

원래 나의 출산예정일은 95년 1월 19일이었으나 어머니의 제왕절개로 인해 94년 12월 28일 생이 되었다. 까딱 잘못했다간 빠른 95년생이 되어 현시대의 무수한 '빠른 년생 혐오'의 대상이 될 뻔했다. 요즘도 가끔은 상상하곤 한다. 만약 내가 빠른 년생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수많은 빠른 년생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3월~12월 생들과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을까?




빠른 년생은 여러모로 불편한 존재들이다. 태어난 날을 멋대로 정할 수야 없으니 우리 사회가 법으로 지정한 '빠른'을 따르는 것 또한 그들의 자의는 아니었을 테지만 이들은 때때로 '족보 브레이커'가 되기 때문이다. 인터넷 세상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우리는 종종 마주치게 되는 빠른 년생들 때문에 대략 난감한 관계에 놓일 때가 많다. 그래서 몇몇 3월~12월 생들은 이들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한다.


혐오의 가장 큰 이유는 '가변성' 때문이다. 비(非) 빠른 년생의 사람들 대부분은 빠른 년생의 태생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물론 일부 그런 사람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들은 빠른 년생들의 박쥐 같은 태도에 분노를 느낀다. 빠른 년생들은 꽤 빈번하게 본인의 나이를 편의에 따라 유리한 방향으로 높여/낮춰 부르기 때문이다.


여성시대


예를 들어 나이가 있어야 할 때의 상황 속 그들은 은근슬쩍 빠른 년생을 어필한다. 우선 성인인증이 필요한 술집에 입장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A는 성인과 청소년의 경계선에 있는 빠른 년생 스무 살이다. 법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임을 명백하게 인지하면서도 A는 억울하다는 듯 외친다. "저 빠른 년생인데요! 학생증으로 증명 안 되나요?" 아쉽게도 점주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 문전박대당한 A와 성인인 그의 친구들은 난색을 표하며 술집을 벗어난다. 친구들은 A의 빠른 생일을 힐난한다.


대학내일


다음으로 인간관계에서 상하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는 첫 만남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B는 재수 후 입학한 빠른 년생 신입생(명목상 20살이지만 21살)이다. 그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자기소개를 마치며 2학년 선배들에게 제안한다. "내가 빠른 년생이라 너희랑 동갑인데. 우리 그냥 말 편하게 하자!" 2학년 학생들은 혼동을 느낀다. 말을 높이라고 윽박지르기도 힘들다. 이 순간, 커뮤니티는 개족보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같은 1학년 학생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어딜 가든 그에게 형/오빠 대접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아홉수를 맞이할 때다. 30살이 된 빠른 년생의 C는 구태여 그의 나이를 한 살 낮춰 29살이라고 말하며 본인은 아직 20대임을 자랑한다. 물론 그 말이 그저 우스갯소리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잘 알고 있지만 어딘가 아니꼬움을 느끼는 것 또한 당연하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D가 나지막이 읊조린다. "그럼 형이라고 불러 이 새끼야" 이는 비단 아홉수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디서나 나이가 필요할 때는 한 살을 올리고 어려 보이고플 때는 한 살을 내리는 이기적인 태도가 고까울 뿐.


대학내일


이렇듯 '정상 년생'의 사람들에게 '사회적 비정상 년생'인 빠른 년생의 가변적 나이 변경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은근한 불편함을 준다. 공공연하게 빠른 년생들을 무시하거나 비하하는 사람들 또한 고작 한 두 달의 차이뿐임을 인정하면서도 일관적이지 못한 그들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 앞선 사례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험적으로 느껴왔던 빠른 년생 논란의 해결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만 나이로 계산을 하거나, 지금은 폐지된 빠른 년생 표기에 따라 '빠른'은 없다고 취급하는 것보다 손쉬운 빠른 년생의 '일관성' 하나면 충분한 것이다. 깔끔하게 본인의 나이를 지정해 그에 맞는 커뮤니티 행동 강령을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수많은 방해 요소로 인해 쉽게 절충하기 힘든 점이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빠른 년생들의 암묵적 합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다. 빠른 년생인 내가 철저하게 규율을 따른다고 해도 다른 빠른 년생들이 마찬가지의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또 다른 개족보를 만드는 상황을 낳는다. 스스로의 행동거지에 사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존재 자체만으로도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다. 어쩌면 어떤 식으로도 비위를 맞춰 줄 수 없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빠른 년생들은 되려 반발심을 가지고 그들의 가장 강력한 강점인 '가변성'의 이빨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boon - 카카오


이렇듯 현시대 많은 빠른 년생들이 불평하는 것처럼 '어떻게 해도 꼬이는 족보'의 문제 때문에 이들은 지나치게 과도한 비난을 받고 있다. 웃픈 것은 내가 제안했던 '나이 지정' 또한 때에 따라서는 '왜 빠른 인 것을 밝히지 않았냐'는 또 다른 비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이'라는 요소로 사람의 높고 낮음을 판별하는 전근대적 사상이 여전히 뿌리 깊은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물론 치졸하게 이 가변성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어느 곳에도 발 붙이지 못하는 외딴섬이 되었다. 고작 한 두 달 때문에!




빠른 년생의 오류를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나이에 예민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견 신기하게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근접한 나이의 사람들일수록 나이를 따지는 것에 더욱 민감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는 연인관계에서 '4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곤 한다. 비교적 정신연령이 어린 남성과 높은 여성의 간극을 매울 수 있는 나이가 '4년'이라는 근거 없는 미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4년이라는 세월은 그 차이가 그리 커 보이지 않음이 큰 이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4지선다, 5지선다 문제에서 유독 3번을 고르는 사람의 비율이 높은 것처럼 나이에서 4살 터울이란 '안정성'을 보이는 숫자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는 경우, 보통 남성을 두고 '도둑놈'이라는 부러움과 비난이 섞인 수식어를 붙이는 걸 봐선, 물론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반말과 존댓말의 공유가 가능한 나이 차이는 대략 4살 전후로 산정할 수 있겠다. 6-70대 어르신들이 그 이상의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울 없이 친구로 지내는 상황들과 비교하면 신기하지 않은가? 과연 이순(順)과 종심(心)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닌가 보다.


SBS 뉴스, <SBS 뉴스 4살 차이가 궁합 최고" 속설, 근거 있을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연륜이 부족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점 때문에 빠른 년생들의 고충이 심화된다. 개개인의 특성이 중요시되는 사회문화가 고착화되기 시작하자 스스로의 정체성에 작은 균열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요소인 '나이'가 젊은이들에게 꽤 중요한 판단의 척도가 된 것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그보다 어린 후배들의 군기를 잡는 모습을 보며 세상이 말세라고 혀를 끌끌 찬다. 그러나 우리 또한 그러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여전히 고작 한 살의 나이 차이 때문에 호칭을 정리하고 감정을 상해하는 모습이 사회 곳곳에 나타난다. 급격한 사고의 개인화와 유교 사상의 합의점을 찾는 과도기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작' 나이 때문에 트러블이 생기는 것에 대해 구시대적이라고 비난하면서도 막상 그 상황을 목도하게 되면 그 누구보다도 길길이 날뛴다.


보배드림


94년생인 내가 빠른 95년생과 친구가 된다면 95년생과 친구인 빠른 96년생과 친구가 되는 것에도 논리 상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작 한 두 달 차이 때문에 확실한 선을 그어 친구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8-9개월 정도의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되는 사람들이 있기에 빠른 년생은 문제가 된다. 결국 모든 인간관계를 관장하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쟤는 친구 해주면서 나는 왜 친구 안 해줘.




한때 나는 빠른 년생들을 너무나도 싫어했다. 내가 싫어했던 사람들은 신기할 정도로 죄다 빠른 년생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대충 몇 마디만 나눠봐도 이 사람이 빠른 년생인지 아닌지를 금세 파악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이들을 내 편협한 사고 안에 묶어놨다. 물론 지금은 그런 생각을 일절 갖고 있지 않지만 대략 90%가 넘는 정답률을 보였던 당시의 기준에 따르면 그들은 대개 왜소했고 교활했으며 어딘가 덜 떨어졌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그 이유가 사회적 편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그룹이든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내던 이들을 애물단지 취급했고 자연스럽게 전혀 그렇지 않았던 그들을 조그마하고 치졸하게 여겼던 것이다. 철저히 내 편의를 위해, 내 안위를 위해, 나만의 만족을 위해 빠른 년생 혐오를 당연시한 것이다.


인스티즈


결국 이 또한 정답이 없음을 모두가 안다. 나와 절친한 친구가 알고 보니 빠른 년생이었다 해서 칼같이 호칭을 바꿀 사람은 0에 수렴할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나이에 예민함의 촉을 세우는 이유 또한 그저 '아니꼬움'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 어딘가 싹수없어 보이는 저 사람이 빠른 년생을 무기로 나와 말을 편하게 하고자 하는 무언의 심리전을 펼치는 모습에 지레 열이 뻗치는 것이고 이를 탄압할 수 있는 사회적 다수의 입장을 구태여 포기하려 들지도 않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음력 계산을, 동아시아 문화권임을 탓해야 할 뿐.


과학의 힘으로 빠른 년생을 탈피한 나는 4개의 나이를 가지고 있다. 한국식 나이로 27살, 만 나이로 25살, 연 나이로 26살, 어쩌면 빠른 년생이었을지도 모른 내 운명을 따른 빠른 27살. 지금도 나는 수없이 많은 빠른 년생들에게 분노를 느끼는 동시에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를 되묻는다. 빠르면 얼마나 빠르다고. 동시에 나이를 먹었으면 또 얼마나 먹었다고.


포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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