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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Oct 02. 2020

주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제발 한 번에 좀 알아들어주세요 ㅠㅠ

우리의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형의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신기하게 여겨지는, 또 어느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주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미용실에서 머리를 어떻게 자르겠느냐는 미용사의 질문에 "그냥 잘 다듬어 주세요"나 "알아서 잘라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서브웨이 같이 주문 방식이 복잡한 가게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며 심각한 경우에는 전화로 주문하는 배달 가게에 커다란 공포심을 느낀다.


웃긴대학, <미용실 찐특.jpg>


혹자는 그렇게 말한다.


그게 뭐가 그리 어렵냐,

주문하기 귀찮아서 대신 나를 시키는 거 같아 짜증 난다,

소심한 찐따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도 그걸 알면서도 바뀌지 못하는 본인을 답답해한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내가 그런 사람이니까.




영화 <미쓰GO>의 천수로(고현정 분)는 극심한 대인기피증을 앓는다. 대표적인 모습은 중국집 배달 주문을 넣는 장면인데 영화 속 그녀는 전화를 통한 음성만으로도 사람에게 두려움에 떠는 인물이라 입력한 텍스트를 음성으로 그대로 읽어주는 기기를 통해 주문을 시도한다. 영화는 이렇게 소심한 그녀가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 범죄의 여왕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종의 장애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씨네21, <미쓰GO를 보니 여자주인공 천수로가 물에 빠진 것을 계기로 대인기피증을 단번에 극복하던데 그게 가능한가요?>


같이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모두 그 역설에 폭소했지만 나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편으론 신박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저렇게 주문할 수도 있구나.


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주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가장 큰 이유가 '소심함'이 아닌 지나치게 배려심이 강한 이들의 성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혹자들이 주로 예상하는 '주문하기 귀찮아서 대신 나를 시킨다'와 정반대에 있는 이유다. 주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타인의 시선을 못 견디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내 주문이 누군가를 귀찮게 해 생겨난 사소한 리액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두 번 볼 사람도 아닌데"는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한다. 부끄러움의 잔상은 아주 오래가며 어떤 사람에게는 재방문의 여지조차 원천 차단하게 만드는 흑역사가 된다. 여기에 "그럼 같이 있는 나는 왜 배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미안하지만 딱히 할 말이 없다. 그저 일면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는 것보다는 우선순위가 아닐 뿐인 것이다. 당신은 이해해줄 수 있으니까.


<청춘아레나 - 장도연 강연>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키오스크는 혁명적인 발명품이다. 나는 처음 키오스크를 대면했을 때, 이것이 혹시 나와 같은 소심한 사람들을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잠시 착각했다. 물론 그러한 이유도 일정 부분 있겠지만 구매 과정의 간소화와 잘못 전달된 주문을 예방하기 위한 이유가 주였다. 그 이유야 어찌 됐든 키오스크는 '주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비교적 압박이 덜한 주문을 가능케 했다. 내 주문을 기다리는 뒷사람의 눈치가 또 다른 두려움을 만들게 했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키오스크가 남발하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그러니까 굳이 키오스크를 쓸 필요도 없는 가게조차 키오스크를 마련하는 이런 시대에 왜 유독 '미용실'과 '서브웨이' 만큼은 구시대적 주문 방식을 따르냐는 것이다! 물론 몇몇 미용실에는 키오스크가 있다. 하지만 이는 헤어 디자이너를 지정하거나 결제를 도와주는 용도일 뿐이다. 아주 세세하게 '투블럭, 9mm, 말 걸지 마시오'를 선택할 수 있는 키오스크는 왜 없는 것인지 나는 너무나 궁금하다. 서브웨이는 또 어떤가. 수많은 찌질이들이 '서브웨이 공포증'을 외쳐대는 것을 무시하는 것일까. 무시무시하고 냉담한 서브웨이 아르바이트생들을 마주하기 두려운 나와 같은 주문 공포자들은 그들의 "네?(아니꼬운 표정으로) 다시 말해주시겠어요?" 이 한 마디에 오늘도 서브웨이 꿀 조합을 포기한다.


인스티즈, <서브웨이 처음 갔다가 울음보 터진 디씨 만갤러.jpg>




이와 같은 '주문 공포증'이 마냥 소극적인 성격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대개 이 부류의 사람들은 사람을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장 내 경우만 봐도 나는 모르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곳에서도 떨지 않고 공연과 강연을 해왔다. 태생적으로 대중들 앞에서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내가 대학시절 조별과제에서 가장 자주 맡았던 역할은 '발표자'였다. 그래서 나는 어느 그룹에서나 소심한 이들의 구원투수가 되었고 그렇게 지인들은 나를 활달한 성격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생각해보면 신기하지 않은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앞에 나서서 발표하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주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연 누가 소심한 사람이고 소심하지 않은 사람인가. 이렇듯 '주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소극적인 성격으로 단정 짓기에는 어딘가 어폐가 있다.


내가 주문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타인의 주목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주문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개인적인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예민함의 촉을 두는 것이다. 공연과 강연, 이 둘은 어쨌든 나를 보러 오기 위해 혹은 우연히 나를 보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 하지만 미용실과 음식점은? 내 주문 하나에 서버(server)들의 시간이 투입된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조심스러워진다. 정당한 금액을 지불하니 그 정도는 괜찮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감정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려주고 싶을 정도다. 때때로 진상이 아님에도 진상 손님이 되는 사람이 있듯이 본인이 진상인지 깨닫지 못하는 진상 손님이 될까 싶어 나는 늘 노심초사한다. 그 정도가 심할 뿐.


이경용 페이스북, <식당에서 주문 못하는 사람 특징>


하지만 그 주변인들의 불편함은 백번 이해한다. 나 조차도 이런 내가 답답한데 당신들은 어떻겠는가. 나는 매번 가게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여자 친구에게 내 체크카드를 쥐어주곤 화장실로 도망쳤다. '배달의 민족'과 '요기요' 덕분에 윤택한 배달문화를 누리기 전까지만 해도 야작이나 단체 행사의 뒤풀이에 주문을 도맡는 막내 역할을 맡게 될까 내심 벌벌 떨었고 지금도 전화보단 문자, 카톡, DM을 훨씬 선호한다.




문제는 나와 같은 '주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종종 희화화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일반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행동이 다분히 '찐'스러워 보이나 보다. 몇몇 사람들은 우리를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라고 폄하하기도 하며 단순히 이기적이고 사고가 어린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주문의 과정, 더 나아가 누군가의 시간을 소모하며 내 요청 사항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낯 뜨거워지는 실수는 누구나 해봄직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벗어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불가능한 사람들을 사회적 지진아 취급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억울하다! 내가 조별과제 발표를 도맡을 때는 그렇게 고마워하더니!


극단적인 주문 상황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 콘텐츠가 있다. 바로 코난 오브라이언 쇼에 등장한 <소심한 사람이 가면 상처 받는 식당>이다. 이 곳의 가게 주인은 빨리 주문하라고 윽박지르며 손님을 하대한다. 우스꽝스러운 언변을 통해 손님을 모독하는 장면에 우리는 쾌락을 느낀다. 자고로 카타르시스는 약간의 불편함이 가미돼야 더욱 증폭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상이다. 이 영상의 포인트는 '누구나' 주문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짚어낸 프로덕션이라는 것이다. 마냥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배려와 '진상들'의 진상짓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꼬집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한국 사회가 '욕쟁이 할머니' 식당에 정감을 느끼는 것과 다르게 우리는 사소한 말실수에도 컴플레인을 건다.


https://www.youtube.com/watch?v=LRJQNTv2QOI

유튜브, <코난 오브라이언 쇼 소심한 사람이 가면 상처 받는 식당 ㅋㅋㅋㅋㅋ>


한국의 예로는 tvN의 <강식당 3>가 있다. 동일 방송사의 <신서유기> 시리즈의 스핀오프 격 예능 프로그램인 이 방송에는 피자를 주문하지 못하는 강호동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는 어찌 보면 너무나 복잡해진 주문 방식과 문화, 더 나아가 이들과의 소통에 지레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 사회의 '어른'들의 모습을 잠시나마 발견할 수 있다. 이 어른들은 젊은 세대의 '주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키오스크에도 쩔쩔맨다. 다들 그런 경험이 오버랩될 것이다.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못해 기능을 알려달라는 부모님과 수십 번의 설명에도 알아듣지 못하는 부모님의 등에 대고 "에휴, 이것도 몰라!" 하며 핀잔을 주는 우리들의 모습 말이다. 나 또한 그랬다.


tvN, <강식당 3>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질타가 아닌 응원을 보내곤 한다. 소심함의 반격의 서막을 알리는 이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나 또한 그랬다'라고 말한다. 그러니 '주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시선이 필요하다. 단편적인 내 편의를 위해 무턱대고 이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해 소심해진 사람들을 마찬가지로 배려하는 상부상조의 태도가 바람직하다.


나 또한 '주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서 이제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 거울 치료가 특효약이긴 한가 보다. 나보다 더욱 내향적이고 소심한 여자 친구를 오랜 기간 케어했던 경험 덕분에 나는 대신 주문하는 사람들의 울분 또한 적확하게 이해하기 시작했고 또 내심 그녀의 소심함에 이유모를 짜증을 크게 느끼기도 했다. 이제 나는 아무렇지 않게 벨을 눌러 주문을 할 수 있고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아르바이트 생들에게 한 번 더 또박또박 재주문을 넣을 수 있는 여유도 갖췄다. 여전히 서브웨이는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깃집에서 불판을 갈아달라는 요청처럼 아주 가끔 몇몇 부분에서는 부탁을 두려워하긴 하지만 말이다.


에펨코리아, <소심한 사람들 특징.jpg>


성인인데,

도전해보지도 않고,

나는 처음부터 잘했니,

그렇게 낯 가려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소심함에 미안함을 느끼고 물을 떠 오는, 수저를 세팅하는, 밥값을 계산하는, 돈을 더 내는 이들의 표현에 조금 더 주목해주길 바란다. 물론 여러분들이 주장하는 '예의 없음'에도 충분한 논리와 타당함이 담겨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조금씩 변화할 수 있는 기다림이 더욱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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