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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Oct 14. 2020

다이어트

이별의 풍미

한 달 전, 여자는 남자에게 다이어트를 선언했다. 연애 이후 체중이 4킬로그램이나 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자는 주먹을 불끈 쥐며 남자에게 이번만큼은 본인을 말리지 말라고 했다. 남자는 대답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다이어트, 난 한 번도 말린 적 없는데.


남자는 딱히 운동을 하지 않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체중이 8킬로그램이나 줄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그를 보며 그의 친구들은 야한 농담을 건넸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칼로리를 소모할 만한 일은 적었고 채울만한 행위는 더더욱 적었다. 그는 요 근래 자주 입맛이 없었고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다. 숟가락을 들면 속이 더부룩했고 물 한 컵이면 허탈한 포만감을 획득했다. 


특히 여자와 함께 있을 때 그랬다.




여자는 편식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자는 무엇이든 우걱우걱, 맛있게 먹는 그녀에게 반해 사랑에 빠졌고 몇 번의 구애 끝에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와 달리 편식이 심하고 음식도 깨작깨작 먹던 남자는 그녀와의 교제 이후, 섭취의 새로운 재미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많은 맛집을 찾아다니며 서로의 맛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아기 입맛의 남자는 의외로 비위가 강했고 뭐든 잘 먹는 여자는 생각보다 단 맛의 지속력에 약했다. 선호하는 메뉴는 각각의 차집합보다 교집합이 더 많았으며 그들의 소울 푸드는 치킨과 김치찌개였다. 그렇게 그들은 맛있는 음식과 함께 수많은 밤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애의 맛과 음식의 맛을 함께 알아가던 그들에게도 갑작스러운 권태기가 찾아왔다. 서울의 한 가정식 백반집에서 여자와 함께 저녁을 먹던 남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현듯 그녀에게 화가 났다. 여자의 젓가락질도, 음식을 먹을 때 내는 소리도, 부풀어 오르는 양 볼에도 괜한 트집을 잡고 싶었다. 그냥 미워졌고 꼴 보기 싫어졌다.


그들은 가게를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처음으로 크게 다퉜다. 여자는 남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반대로 남자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해답이 없는 말싸움을 반복하다 끝내 각자의 시간을 가지기로 합의했다.


합의의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다. 뭐든 잘 먹는 여자는 수더분했고 아무렇지 않게 이튿날, 남자에게 화해를 청했다. 남자는 엉겁결에 사과를 받았지만 어딘가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남자는 훨씬 이후에야 그가 겪은 소화불량의 원인을 알아냈고 체기를 빼내기 위한 바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그 끝은 예리해졌다. 중요한 것은 언제 손가락을 찔러 피를 보냐는 것이었다.




기념일을 맞아 그들은 좋은 레스토랑을 방문했다. 여자는 불과 두 달 전의 다이어트 선언을 말끔히 잊은 게 틀림없다. 재잘재잘 무얼 먹을까 떠드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남자는 오늘은 꼭 말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개방형 주방을 갖춘 레스토랑은 조리과정을 직접 지켜볼 수 있어 음식을 보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여자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이런 레스토랑은 어디서 찾았냐고 남자에게 질문했다. 그냥 뭐. 인스타그램에서 봤어. 남자는 한 번의 기회를 날렸다.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았다.


메뉴판 이곳저곳을 들춰보며 아무렇지 않게 주문을 마친 여자를 보며 남자는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다이어트를 한다던 여자는 그새 살이 더 붙었고 반대로 남자는 더 빠졌다. 문제는 여자가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깨작대는 남자를 향해 반찬 투정하지 말라는 잔소리만 늘어놓았다. 뻔뻔한 그녀의 모습에 두 번째 기회를 날렸다. 배는 더욱 고프지 않았다.


주문했던 메뉴가 테이블에 올랐다. 좋은 재료로 만든 메인 디시는 먹음직스러웠다. 남자는 그 광경과 돈이 아까워 휴대전화를 꺼내 음식 사진을 찍었다. 여자는 밥과 시간이 아까워 남자의 눈을 보지 않았다. 다 찍었어? 남자의 대답이 채 돌아오기도 전에 여자는 포크를 들이밀며 식사를 시작한다. 남자는 식사예절 앞에 세 번째 기회를 날렸다. 배는 더더욱 고프지 않았다.


김이 나는 접시 앞에서 여자는 음식에만 집중하고 있다. 여자를 따라 남자도 몇 입 먹는다. 너무 물리는 맛이다. 남자의 입은 금세 냅킨 뒤로 물러선다. 입에도 대지 못하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잘도 먹는다. 스튜가 특히 입에 맞나 보다. 남자는 그릇을 여자 쪽으로 슬그머니 밀었다. 남자는 그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다. 아니, 헛구역질이 나왔다. 남자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고 배가 아파왔다.




이제 그만하자.


남자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 끝에서 작은 핏방울 하나가 솟았다. 불현듯 남자의 아파왔던 배는 가라앉고 평온이 찾아왔다. 두런두런 들려오는 옆 테이블의 대화 소리를 빼면 레스토랑은 꽤 조용했고 그들의 식탁에는 여전히 김이 조금씩 나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바쁘게 움직이던 숟가락과 포크가 멈췄다는 것은 남자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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