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Oct 20. 2020

기회비용

내 시간과 돈을 돌려주세요

부끄럽지만 나는 이별에도 종종 기회비용을 따진다. 내가 쏟아부었던 시간과 돈이 이제 와서 사뭇 아까운 것이다. 이렇게 비참하게 나를 떠나갈 것이라면 적어도 '내 것'을 함부로 쓰지는 말았어야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느꼈던 애정의 지불액은 그렇게 관계의 종말이라는 ATM 기기를 통해 커다란 감정의 빚으로 환전된다. 그것도 어느 순간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채 빚.


사실 아깝기보다는 억울했다. 내가 당신에게 투자했던 모든 것들을 금전으로 환산한다면 최신형 휴대전화나 노트북 정도는 너끈히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만큼 커다란 가치를 가진 내 사랑을 매몰차게 버리고 밥값 한 번 내지 않는 사람에게 홀랑 넘어가다니. 수중의 현금 전부는 물론 하나밖에 없는 지갑마저 통째로 빼앗긴 기분이다. 거기엔 돈 보다 소중한 추억들이 담겨있는데. 억울하다. 양심이 있다면 변제해줬으면 좋겠다.




우리의 6개월을 따져본다. 아마 한 달 기준으로 대략 120시간 정도를 함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롯이 하나였던 시간은 약 720시간. 최저시급을 기준으로 6백18만 4800원이다. 데이트 비용은? 은행 어플을 통해 확인해보니 한 달 기준으로 대략 40만 원 언저리다. 그녀와 무언갈 먹고 마시고 구입하는 것에만 240만 원가량을 썼다. 추가 비용도 있다. 그녀 때문에 다시 피우기 시작한 담배. 이틀에 한 갑 꼴로 피워댔으니 한 달에 15갑, 67,500원이 여섯 달이면 40만 5000원이다. 술은 또 어떤가. 그녀와의 연애가 힘들 때마다 내 푸념을 묵묵히 들어주던 친구들에게 차마 술까지 얻어먹을 순 없지 않은가. 일주일에 한 번, 4만 원 정도의 술자리가 있었다. 술잔에 담아 넘긴 내 고민의 무게가 120만 원어치. 합계를 도출하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린다. 


₩ 10,189,000


너를 만나며 포기한 내 기회비용이 천만 원을 넘기다니. 갑작스레 상상하게 된다. 그녀는 과연 얼마나 썼을까. 나보다 높을까? 낮을까? 우리의 씀씀이는 얼마 정도의 격차가 날까. 모르겠다. 아니, 모르고자 한다. 매번 더 많은 것을 지불했다고 생각했던 나는 저 8자리 숫자보다 더 큰 플러스알파의 기억 때문에 애써 기회비용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는 것이 권장되기도 한다. 이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애써 쿨한 척, 내 돈과 시간을 돌려받고 싶다는 장난 같은 넋두리 앞에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게 아까울 정도면 너도 참 한심한 사랑을 한 거지"라고 충고했으니 말이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그렇게 맞는 말도 아닌 것 같다.




특히나 돈과 시간이 아까웠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다음의 연애 때문이었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 늘 그렇듯이 또 하나의 애틋하고 아깝지 않은 사랑은 운명처럼 우리를 찾아온다. 그러니 무언가 아쉬움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녀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이전의 연애에서 낭비했던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이브해 더 좋은 것들을 마련해주었을 텐데. 더 큰 사랑을 전했을 텐데.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높낮이를 분간할 수 없는 영역의 기회비용마저 예상하며 쓸데없는 후회에 빠지는 것이다. 확정된 과거의 아까움과 불확실한 미래의 부족함을 방지하기 위해 나의 미련한 경제관념은 그렇게 끊임없는 다 카포를 맞이한다.


그래서 연애란 사실 득 보다 실이 많은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돈과 시간, 감정을 도합해 가격을 매기던 나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감정을 분명 느꼈을 테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 '치정'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저 지나친 개인주의를 탓해야 할까. 이별은 남보다 더한 사람을 만든다. 그래서 구태여 회상하지 않으려 우리는 갈수록 희미해지는 추억이란 상품에 가격표를 달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을 맞이했다 자신하면서 사랑을 놓아줄 때는 차갑고 소극적인 사람들. 투덜거리게 된다. 자기들도 돌려준다고 하면 날름 받을 거면서.




언젠가 그녀와 장난으로 계약서를 작성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서로의 단점과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사건들을 예방할 수 있는 조항들을 써냈다. 그중 몇 개는 지켜졌고 몇 개는 지켜지지 않았다. 


헤어지자고 먼저 말한 사람이 천만 원을 지급할 것. 

외도의 정황적 증거가 포착될 경우, 상대방에게 5백만 원을 지급할 것. 

메시지에 초성으로 답변을 남기는 성의 없음이 5회 이상 발견될 시 유료 이모티콘을 선물할 것. 

음주 이후에는 3번 이상 전화하지 않을 것. 

신뢰를 저버리는 거짓말을 할 경우, 3일 이내로 대면해 미안함을 표시할 것. 

다툼 후, 아무리 참을 수 없는 화가 나더라도 상대방의 동의 없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


우리 사회는 얻는 게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게 있다고 말한다. 영화 <해바라기>의 오태식처럼 다 가지려는 사람들에게 일갈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 기회비용을 따진다. 그게 더 경제적이니까. 내 돈과 시간은 한정적이며 쓸데없는 곳에 낭비되는 것은 아까우니까. 그러나 우리는 돈과 시간을 아끼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사랑은 그것을 초월하는 가치라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사랑을 속삭이며 우리가 허비했던 돈과 시간은 지금 어디에, 무엇을 남겼나.




나는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나면 무의식적으로 기회비용을 따져왔다. 연애 중에는 의식적으로 그러한 과정을 피해왔기 때문이었다. 낙장불입의 연애는 매몰비용의 연속이었으니까. 당장에 돌려받고 싶어도 마음대로 회수할 수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더 많은 사랑을 투입해야만 이 사랑이 '아깝지 않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으니까. 나 또한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했다. 돈도 시간도 마음도 한없이 쏟아부어야 한다고. 


독의 밑바닥은 이미 깨져있었는데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가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