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한부 20대 (4)

화장품 다이어트

by 채율립

요즘 내 머릿속은 20대가 끝나간다는 '시한부 20대'라는 말이 선연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살았던 20대의 삶을 살펴보고, 고치고 싶은 습관을 찾아내고 개선하는 일이 요즘의 주된 화두가 됐다. 매일 기록하면서 20대의 마지막을 기억하려는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그동안의 무분별하게 샀던 책을 정리하는 '책장 정리', 따듯한 몸을 만들기 위한 '얼죽아 클럽 탈퇴'를 시작으로 요즘 내가 하고 있는 건 '샘플 화장품 없애기'다.

여행을 즐겨 다녔던 내게 샘플 화장품은 어쩌면 다음번 여행을 기약하게 만들어주는 설렘의 표상이었다. 샘플 화장품을 보면 다음 여행에는 이 샘플을 써야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감정이 늘 따라다녔다. 그 말은 반대로 여행을 갈 때 필요하기 때문에 샘플 화장품을 잘 모으기도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샘플 화장품은 목적을 잃었다. 그래서 여행 짐을 쌀 때만 거의 열었던 샘플 화장품을 모아놨던 서랍. 그 서랍을 열어봤다. 그리고선 조용히 쓰레기통을 들고 왔다. 유통기한이 지난 샘플이 어마 무시하게 많았다. 그만큼 여행을 못 떠난 것이다.

재활용 가능한 통은 깨끗하게 씻어 재활용 함에 버리고, 재활용이 안 되는 것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유통기한이 지난 샘플을 한 바구니 버렸는데도 샘플 화장품은 여전히 차고 넘쳤다. 심지어 좋은 샘플 화장품이 많았다. 당분간 여행을 못 갈 테니, 이것들은 모두 다 짐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기초 화장품을 사지 않기로 했다. 남은 2020년 동안 이 질 좋은 짐을 차근차근 다 써보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나 썼는지 한눈에 보이게 다 쓴 샘플 화장품을 담는 통도 하나 만들었다. 한 번에 모아 연말에 버리려는 계획으로.

그 통에 다 쓴 화장품 샘플을 하나씩 넣을 때마다 왠지 저금통에 동전을 넣는 기분이 든다. 원체 저녁에 씻고 나서 로션을 바르지 못하는 병에 걸린 나에게 이 샘플들은 특효약이 되고 있는데, 그 통에 넣고 싶어서 빨리 써야 하니 저녁에도 로션을 바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안티에이징이 필수인 29살에 너무나 좋은 습관이 되고 있다. 갑작스럽게 피부가 좋아지는 것 같다. 또, 화장품에 대한 나름의 취향도 알게 되니 일석이조다. 이렇게 화장품 다이어트를 하면서 코로나19로부터 해방될 날을 기다린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시한부 20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