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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쿠나마타타 Sep 01. 2022

더 이상 낮술이 즐겁지 않아

마음 챙김으로 절주 하기 D 23

여유로운 호주인들은 수요일부터 술을 마신다. Hump day라고 해서 '일주일에 중간을 잘 버텨줬어! 맥주가 보상이야' 하면서. 최근에 개인 비즈니스가 잘 풀리지 않자 일을 최대한 빨리 마치고 책을 매일 한 권씩 읽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는 수단이 됐다. 이 불안함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이 라니라고, 자청님 말을 빌리면 그런 말들로 '자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가장 효과적인 자위를 하고 있으니까.


일을 3시쯤에 끝내고 헐레벌떡 책을 챙겨서 카페 숍에 간다. 집에서 일하는 나는 집에서 하루 종일 앉아있기가 괴롭다. 하루 정도는 기분전환 삼아서 커피숍에서 읽기로 했다.


커피숍에 도착하니 3시 반, 으흐.. 어쩌지? 호주 커피숍은 4시에 문을 닫는다. 책을 30분 정도 읽고 다른 읽을만한 곳을 찾는다.


그렇다. 펍이다. 

그렇다. Hump day다.


내 머릿속에 합리화를 시작한다. '이번 주도 열심히 살고 있잖아. 나는 절주도 잘하고 있고... 마음공부에서 젤 중요한 게 뭐야? 감정이라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게 중요해'


그러고 책을 펼치고 작은 사이즈의 맥주를 시킨다. 나에게는 규칙이 있다. 물을 꼭 마실 것. 

책을 읽으면서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시원하고 과일맛이 나는 씁쓸한 맥주 거품이 내 목을 타고 들어간다. '캬아... 역시 호주 맥주가 최고야!' 그리고 나의 감정을 관찰한다. '그래.. 이제 도 파인이 활동해서 나를 즐겁게 해 줄 거란 말이지?'


책을 한 시간 정도 읽었을 무렵 나는 이번엔 큰 사이즈로 한잔을 시킨다. '아휴- 해피아워 (Happy hour)라서 작은 거 시키는 거랑 가격이 같아서 그래' 라며 또 나를 설득한다.(머리속 그 여자는 어찌나 말을 잘하던지 항상 넘어간다.) 점점 기분 좋아지는 감정이 느껴진다. 하지만 빼놓지 않고 물을 많이 마신다. 왜냐면 이 기분이 좋아지는 건 맥주에서 나오는 뇌의 교란 성분이기 때문이니까... 이것 때문에 중독이 되고 사람들이 계속 술을 마시는 것을 안다. 나는 아는 것만으로도 조절을 할 수 있다. 


책을 읽는데 술이 깰수록 점점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열심히 운동하는 이유는 병 때문에 달고 다니는 만성 피로를 조금이라도 덜기 위함인데 낮술이 나를 너무 피곤하게 만든다.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


나는 책을 덮고 집에 간다. 평소 같으면 집에 가는 길에 맥주 1 pack(6병)을 사서 룰루랄라 신이 나서 집에 가고 있었을 텐데, 나에게 느껴졌던 맥주의 환희 뒤에 오는 그 피곤한 감정을 관찰하고는 마시고 싶은 감정이 확 살아졌다.


내가 왜 술을 마시는지, 술을 마시면 기분이 어떤지, 술이 깨면 기분이 어떤지를 관찰하니 더 이상 낮술이 즐겁지 않았다. 


오늘 이후로는 낮술을 마시지 않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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