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아이 정화의 끝판왕
게임을 하면 가장 흥미로운 것이 바로 끝판왕이다.
그 많은 스토리를 따라서 사이드 퀘스트를 지나, 여러 가지 몬스터들을 죽이지만 그 스토리 빌드업과 모든 몬스터를 합쳐놓은 것 같은 근사한(?) 끝판왕을 만난다.
나는 게임을 하지는 않지만 게임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스토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 어드벤처가 얽히고 섞여 게임마지막엔 가장 드라마틱한 끝판왕이 나온다. 그 몬스터 디자인도 사랑하고(인간의 상상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스토리도 사랑한다. 한 편의 드라마가 끝나는 기분이다.
나의 내면아이 정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면아이 정화를 의도(?) 하지 않았다. 명상을 하면서 그것이 저절로 일어났고, 나의 아픈 과거와 잘못된 기억에 사랑을 주고 기억을 고쳐내니 사는 것이 훨씬 편해졌다. 마치 그전의 삶은 전생의 삶을 사는 것처럼 정말 다른 삶이었다.
하나둘씩 나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있을 때쯤 나는 나의 끝판왕을 만나고 있다. 바로 나의 상처의 뿌리다.
그전에 나의 상처를 어떻게 자각했는지 나의 챌린지를 소개하려 한다.
나는 이상한 챌린지를 매일 하고 있다.
바로 루시드 드림(자각몽)이다. 더 정확히는 드림명상(잠명상)이다. 나는 이 챌린지를 일 년 반이나 하고 있다. 챌린지라고 함은 내가 실패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 년 반동안 성공한 것은 딱 하루. 작년 내 생일이었다. 선물처럼 루시드 드림을 성공했지만, 그 이후에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잠 명상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고, 잠 명상도 자기 전에 매일하고 있으며 유튜브도 파볼 만큼 파봤다. 그런데 안된다. 그래도 매일 시도한다. 그 매일의 시도에 들어있는 한 가지가 바로 '꿈일기'이다.
우리는 놀랍게도 매일꿈을 꾼다.
나는 꿈을 잊어버리기 전에 눈을 뜨자마자 말도 안 되는 꿈속의 이야기들을 적는다. 보통의 많은 책들의 저자들은 한 달 동안 꾸준히 쓰면 루시드 드림을 꾼다는데 나는 일 년 반이나 꿈 읽기를 적는데 도통 꿀 수가 없다. 하지만 나의 꿈 일기에서 패턴을 발견했다. 꿈속에서 이 패턴을 인지하면 '이건 꿈이네'라고 자각하면 드디어 자각몽 루시드 드림이 완성된다.
그 패턴이 바로 '엄마'다.
엄마가 나의 꿈 일기의 80%를 차지한다. 엄마가 꿈에 나오면 나는 이것이 꿈이구나 하고 자각하면 된다. 그 이유는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호주에 홀로 떨어져 살고 있다. 엄마는 2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다. 우리 모녀는 무뚝뚝해서 연락도 잘 안 한다. 너무 신기하게도 엄마가 꿈에 자주 나온다. 나의 친구처럼 여행을 같이 가기도 하고 선물도 고른다. 엄마는 항상 젊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나온다. 그래서 항상 꿈에서 깨면 이불킥을 한다.
'오늘도 엄마가 꿈속에서 나왔는데 왜 자각하지 못했을까!'
'엄마가 보이면 꿈이라니까!!'
그렇게 일 년 반째다.
그렇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하필 왜 엄마가 이토록 자주 보이는 것일까? 나의 무의식이 하려는 말이 도대체 뭘까. 나는 일 년 전에 그 키를 알 수 있었다.
일 년 전, 나는 남자친구 아버님일을 도와드리러 다른 지역으로 3주 정도 지내다 온 적이 있다.
시골도시라서 호주 안에서도 비행기를 두번타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여러 가지 문제로 일이 풀리지 않았던 우리 커플은 큰 기분전환이 될 겸 가족들에게 기대는 그 시간을 소중히 생각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사는데 그중에서 남자친구의 이모님은 기독교에 깊게 심취되어 있으면서도 영적으로 연결도 되어있는 분이셨다.
이모님의 집엔 사람의 오오라를 측정해서 그 사람에게 메시지를 주는 기계(?)가 있었다.
안다. 듣자마자 '이거 사기 아니야?' 하고 의심할 것이란 것을.
그런데 나는 작년 일 년 동안 신비한 영성체험 중이었으니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계에 내 몸을 연결해 차크라도 맞춰주고 평소에 나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 기계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수치심'
수치심? 안다. 우리가 생각하는 수치심. 그때는 그 단어가 의아했지만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너무도 희한하고 신기한 동시성으로 나는 집에 와서 며칠 동안 수치심에 대한 책을 읽기 되었다. 심지어 나는 수치심책을 일브로 고른 것도 아니고 우울증에 관한 책을 고른 것이었는데 그 책에는 수치심에 대해서 너무도 자세히 나와있었다.
수치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치심이 아니었다. 수치심은 남에게 잘 주면서 나는 못 받는다. 도움도 못 받고, 남이 호의를 베풀면 자신이 약자라고 착각하면서 피해자의식이 있다. 완벽주의 성향이 너무 심해 주위를 통제하려고 한다.(환경과 사람 모두) 마음대로 안 풀리면 지옥에 있는 기분이다. 남에 대한 의식이 너무 심해서 남에 대한 평판에 너무도 민감하다. 당연히 비교도 심하게 한다.
이 수치심은 어렸을 때 만 4살 이전에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부모님과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회복탄력성이 건강하게 형성된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질책을 당하고 자기 존재에 대해 존중받지 못한 경험이 쌓이면 아이는 그렇게 성장을 한다.
이러한 내용의 책들을 일이 끝나면 뒷마당에 강아지들과 고양이와 앉아 햇빛을 받으며 모두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 안에 아주 큰 상처가 건드려지기 시작했다. 맞다. 나의 가장 큰 문제이자 뿌리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책의 구절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거의 꺼억 꺼억 우는 수준으로 울기 시작했다.
한 시간을 목놓아 펑펑 울기도 했다.
그 기계 참 용하네.
맞다. 나는 그 수치심 덩어리였다. 그 수치심 덩어리 엄마로부터 모든 기질을 물려받은 수치심이란 그 단어가 나의 성격을 정의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꿈에서는 엄마를 계속 보여주였다. 나의 '수치심'을 알아차리라며.
그래서 작년 1년 동안은 수치심을 덜어내는 작업을 참으로 오래동안했다. 뼈를 깎는 과정이 맞는 것 같다. 새로운 나로 살아야 했으니까. 정말로 나의 뿌리를 건드리는 작업이었다. 나의 우주를 바꾸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렇지, 그 끝판왕이 여기 있었다. 수치심 상태에서 사는 삶은 내가 지옥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인지'하는 것만으로 나의 세계는 이미 절반이나 바뀐다.
문제는 실제 엄마와도 부딪히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완벽한 삶을 요구한 엄마에게 화가 났다. 나 또한 엄마랑 똑같은 병을 앓고 있고 똑같이 암수술을 했는데 남들처럼, 혹은 남들보다 더 완벽한 삶을 살라고 나를 통제하려 했다. 엄마는 내가 엄마의 거울이라는 걸 왜 모를까? 내가 엄마의 거울이라면 엄마는 나를 통해 과거를 보고 있는 것인데 과거의 엄마에게 이리도 혹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것때문에 아직 심통이 난 상태다.
나는 '그 무언가'가 되어 있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소중하다. 내가 무엇이 되려고 이제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들판에 핀 꽃, 날아다니는 꿀벌 한 마리, 나무 한그루가 저마다의 쓰임이 있고 존재만으로 소중하듯이
나는 나로서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