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차크라 명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제3의 눈' 차크라에 집착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만물을 꿰뚫어 본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유튜브 채널에서는 제3의 눈동자가 열리게 되면서 투시능력까지 가진 사람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래서 초능력이라도 갖고 싶은 우리의 간절한 마음 때문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제3의 눈동자가 열린다는 것은 지혜의 눈이 생겼다는 것을 말한다.
회사에 출근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일을 하면서 부딪히는 일들이 있었다.
고작 5주밖에 출근하지 않았으면서 벌써부터 사람 때문에 힘들다니, 나를 자책하고 있었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나와 거리를 두고 한 발짝 떨어져서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명상을 통해 내가 관찰자가 되어서 이 상황을 지켜보니 여기에는 적절한 답이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 명상을 통해서 나의 상황을 지켜보고 그 해답을 가지고 나와 마찰이 있던 보스에게 말했다. 보스는 흔쾌히 이 상황을 이해한다며 한발 물러서 주었다. 그러고 나서 마음은 참 간사하게도 어제까지는 지옥 같던 마음을 말끔히 정리해 주었다.
나는 내 에고에 휘둘리지 않는다.
모든 성인이 말하는 '이 세상에 완벽하다'면 고통을 겪고 있는 나의 문제일 것이다.
고통은 집착에서 시작된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만약 내가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면 상대방의 에고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상대방의 에고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정중하게 말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선생님이 되었다. 비록 어떤 상황 때문에 지옥 같은 마음이 생기더라도 나는 거기서 무엇이든지 배울 수 있었고, 강인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그 보스와는 여러 번 마찰이 있었고 나는 그때마다 개인 면담을 요청하며 정중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관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눈을 갖게 해 준 것이 무엇인가?
나를 관찰자로 보게 해 준 바로 그 '눈' 때문 아닌가?
바로 제3의 눈이다.
내가 해석하는 제3의 눈은 이런 식의 지혜의 눈을 말한다.
현실에 딱 붙어서, 내 생각에 딱 붙어서, 내 감정에 딱 붙어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제3의 눈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현실을 보는 것.
그렇게 하면 알아서 지혜의 답이 생긴다는 것이 깨달음으로 왔다.
이것이 위빠사나의 연장선상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나의 에고인지 너의 에고인지 사람을 관찰하는데 안목도 생겼다.
헤르만 허세의 '데미안'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도 사람들의 심리를 관통하는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 주인공이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구절들 말이다. 나는 헤르만 허세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상을 많이 하고 종교와 철학을 공부한 그의 눈도 날카로웠으리라.
명상과 심리학책을 많이 읽은 나도 사람을 볼 때 어떤 사람일까 분석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바로 제3의 눈도 그런 면을 도와주고 있다.
그것으로 '내가 널 다 안다'라는 에고의 잘난 척보다는 '내가 너를 이해한다'라는 연민의 관점이 크다.
우리 모두 사람이고 완벽하지 않고 과거의 경험으로 다져진 우리이기에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봐도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다.
나의 제3의 눈의 해석이 어느 날 달라질 수 있을지 몰라도 나의 의식이 관통하는 지금의 감정은 지혜의 감정이다. 우리 모두가 관찰자가 된다면 누구도 지혜로울 수 있다고 나는 자신한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지혜로운 관찰자가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