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 생일날은 항상 가족들이 모이는 식당이 있다. 근 7년 가까이 이 식당에서 가족 모임을 하는데 가성비 갑이고 분위기도 좋아서 항상 즐거운 식사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코로나 확진자가 창궐하다 보니 오늘 예약 손님은 우리뿐이란다. 정말 믿기지 않아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식사를 했는데 정말 우리뿐이었다. 전에는 손님이 많아 음식이 나오는 시간이 무척 길었는데 오늘은 모든 음식들이 순차적으로 빠르게 나왔다. 하지만 종업원이 부족했는지 치우는 속도는 느렸다. 이곳을 이용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다음 음식을 받기 위해 우리가 치우고 우리가 가져다 먹었다.
사실 올해는 이 모임이 취소될 뻔했다. 사촌 오빠는 코로나로 인해 확진자가 되어 자가 격리 중이고 아이들은 확진되었다가 나은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이번 생일은 불가피하게 미루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령의 고모는 언제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예전처럼 식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나 보다. 엊그제 갑자기 고모 생신 모임을 하기로 했으니 오실 수 있으면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고령의 고모 2분과 우리 어머니 77세 노인들이 모이기에는 코로나 상황이 심각하니 올해는 그냥 고모네 가족들만 모여 식사하고 전체 생일 모임은 생략하자고 사촌오빠가 말씀드렸더니 90세 고모는 코로나가 심하다 해도 생신 모임을 원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다 한자리에 모였다.
사실 나는 친척 모임을 싫어한다. 모임에 가면 항상 듣는 레퍼토리가 있어서다.
아이고 어째 아직 시집을 안 갔어?
(나이가 많아서 못 간다고 하면) 올해 니 나이가 몇이지?
(나이를 말하면) 아이고 아직 젊네. 지금이라도 가야지... 하신다.
(네? 제가 젊다고요?... 아이고...)
친척이라고 해도 일 년에 많아야 한 두 번 만나는 관계라서 매번 이런 말밖에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웬만하면 친척 모임은 안 가고 싶지만 점점 나이가 드니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 발목을 잡아서 오히려 모임에 가야 할 때가 더 많다. 그나마 둘째 고모와 셋째 고모는 자주 만나는 사이라 마음 편하게 참석하지만 확실히 어쩌다 한 번 만나는 아이들이나 다른 가족들은 여전히 서먹서먹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레퍼토리를 나도 모르게 할 때가 있다. 두 고모 생신 모임에 가면 매년 자라는 아이들의 얼굴이 몰라보게 달라져서 나도 예전 친척 어른들처럼 지금 초등학생인가?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인가? 올해 니 나이가 어떻게 되니? 아이고, 벌써 나이를 그렇게 먹었어? 세월 참 빠르다. 너 어렸을 때 진짜 귀여웠는데... 등등 아이들에게 매번 형식적인 질문과 세월의 빠름만 언급하곤 한다. 그런 말들을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기억나는 정보도 없고 최근 소식도 잘 모르기 때문에 가장 편하고 쉬운 어렸을 때 이야기만 할 수밖에. 그때는 그랬다면서...
고모 생신 잔치의 대미는 가장 어린아이들이 촛불이 켜진 케이크 주변으로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노래가 끝나면 각자 자기의 역량대로 할머니 고모에게 애교를 부리고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물론 이렇게 하면 헤어질 때 기분이 좋아지신 고모가 그 아이들에게 과분하게 넘치는 용돈을 수여하곤 한다. 가끔 50이 넘은 나에게도 용돈을 주실 때가 있다.
어쨌든 가족 중 가장 어린아이들이 고모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노래도 부르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성인이 되어 직장 생활을 하는 큰 사촌 조카가 한 마디 한다.
사촌 조카(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 에고~ 귀여워라. 너희들 정말 귀엽다.
나(가소롭다는 듯이) : 너도 저 때 정말 귀여웠어.
그 말을 듣던 작은 고모가 "너도 저 때는 얼마나 귀여웠는데... 왜 시집은 안 가고...." 하신다.
"아이고 고모, 지금 내 나이가..." 하다가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고모 앞에 귀여운 애교를 부리며 상황을 회피한다.
나는 지금 내 나이 스물, 서른, 그때 꿈꾸던 모습은 아니다. 어느덧 마흔을 지나 쉰이 되니 가끔 신기하다. 내가 이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내가 꿈꾸는 대로 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그 아름다운 시간을 지나와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오늘 구순이 되신 고모도 자기가 90년이나 살았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고 하신다. 나도 고모처럼 예순, 일흔, 여든... 그때가 되면 어떤 생각을 할까?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젊고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고백할까? 아마 그때도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지금처럼 살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 오랫동안 못 뵈었던 늙고 왜소해진 고모들과 엄마 그리고 어느덧 나처럼 조금씩 나이 들어가는 사촌들과 조카들. 이렇게라도 모여 깊은 이야기는커녕 근황도 잘 몰라도 반가운 인사와 간단한 안부라도 나눌 수 있으니 고마울 뿐이다. 부디 아프지 말고 모두들 건강하길....
그리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가 꽃처럼 아름다운 날이 되도록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