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켈트와 글렌코
맥베스 : 이렇게 더럽고 고운 날은 본 적이 없구려!
So foule and faire a day I haue not seene.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서 출발한 1박 2일의 하일랜드 투어. 영국의 겨울 날씨가 원래 그렇다지만 그 중에서도 더 북부로 가는 여행이니 더더욱 날씨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미니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가 가이드가 우리를 급하게 불러서는 "지금 당장 오른쪽 하늘을 보세요! 아마 이게 투어 중 여러분이 보게 될 유일한 파란 하늘일 지도 몰라요!"라고 소리쳤다.
그렇게 단 3분, 그 때가 우리가 하일랜드 여행 중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맥베스도 스코틀랜드의 날씨를 "더럽고도 고운 날 (foul and fair)"이라 표현했다. 그가 앞으로 행할 음흉한 계략과 성취한 권력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지만, 표면 그대로 읽는다면 '(날씨가) 아주 사납지만 또 그런대로 꽤 괜찮은'이라는 뜻도 된다.
햇살이 쨍쨍하지 않다고 아쉽기만 한 건 아니었다. 회색빛 구름, 불투명한 안개가 주는 그런대로 괜찮은, 잔잔한 평화가 있었다. 하일랜드는 그런 날씨와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에든버러에서 인버네스로 올라가는 길에 제일 첫 경유지인 던켈트(Dunkeld). 대성당을 중심으로 꾸려진 작은 도시로 보였지만,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는 나름 인기 휴양지라 호텔이며 식당이 꽤 들어서 있는 곳이었다. 마치 흑백사진 필터를 씌운듯. 비가 내리진 않았지만 습기로 공기는 축축했다. 파란 하늘, 눈부신 햇살이 아니라도 경치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어? 이곳 근처에는 맥베스가 전투에서 처참히 지는 '버남 숲' 근처라고 한다. 아! 맥베스의 동네가 여기구나!
가이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맥베스의 1막 1장이 이해가 되었다.
(1막 1장) 천둥과 번개. 세 마녀 등장.
마녀 1 : 천둥, 번개, 아니면 비 속에서
언제 다시 우리 셋이 만날까?
마녀 2 : 난리 소리 멈췄을 때
싸움이 판가름 났을 때.
마녀 3 : 그때는 해 지기 전일 거야.
마녀 1 : 장소는 어딘데?
마녀 2 : 황야야.
마녀 3 : 그곳에서 맥베스를 만날거야.
천둥과 번개와 비. 그리고 안개. 황야. 그래, 이런 날씨속에라면 언제 어디서 세 마녀가 불쑥 나타나도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다. 맥베스와 뱅코가 뿌연 안개 속 세 마녀를 보고 여자인지 남자인지, 사람인지 유령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 것도 이해가 간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는 스코틀랜드 왕위 찬탈을 두고 영주 맥베스라는 인물이 벌이는 스릴러 정치극이다. "네가 왕이 될 상이다"라고 예언하는 세 마녀의 말을 듣고 은밀히 아내와 쿠테타를 결심하고 왕을 죽인 뒤 왕위에 오르지만 자신이 저지른 부도덕한 일에 불안해하는 한 인간의 야망과 유악함 사이의 줄다리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일랜드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글렌코(Glencoe)에 가면 세 자매(Three sisters)라고 불리는 세 개의 봉우리가 있다. 세 자매라는 이름에서나, 이 세 봉우리를 감싸는 자욱한 안개와 음침한 분위기에서나, <맥베스>의 세 마녀가 천둥과 번개와 비를 동반한 어느날 다시 만난다면 그 장소는 바로 이곳, 글렌코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형 때문인지 잠시 내렸을 뿐인데도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고대 화산 폭발로 이런 지형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광활한 황야에 봉우리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곳은 절경 뿐 아니라 '글렌코 대학살'이라는 스코틀랜드인의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종교적 분쟁을 끊임없이 해왔는데, 제임스 2세 폐위 후 왕권을 잡은 윌리엄 3세는 스코틀랜드 재커바이트(제임스 2세 지지세력) 세력에 강경책을 펴며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거센 바람 때문에 충성 서약을 맺으러 떠난 맥도날드 가문의 수장이 약속한 시일보다 늦게 도착하게 되고, 왕은 이를 오해하여 캠벨 가문의 군대를 보내어 글렌코에 살고 있는 맥도날드 가문 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였다는 사건이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에서는 오히려 반발심이 높아지고 재커바이트가 결속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때론 상상력의 문학보다 역사적 사실이 더 문학 같다.